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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인천부사 이단상과 아들 이희조

by 형과니 2023. 4. 1.

인천부사 이단상과 아들 이희조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36:25

 

인천부사 이단상과 아들 이희조

인천사연구소 전임연구원 남달우

 

 

조선시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인천의 수령으로 부임한 경우가 있으니,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이다.

 

이단상(李端相)은 인조 6(1628)에 태어나서 현종 10(1669)에 세상을 떠났으며, (, 성인이 된 후에 부르는 이름)는 유능(幼能)이고, 호는 정관재(靜觀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인조 26(1648)에 지금의 대학 수학능력시험이라 할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고, 다음해에는 현재의 행정고시라 할 수 있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현종5(1664) 6월에 인천부사(3, 인천시장)로 부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사헌부(지금의 감사원) ‘집의에 임명되어 인천을 떠나게 된다.

 

서거한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는 효종 6(1655)에 태어나서 경종 4(1724)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으로 조선 후기 대 유학자 송시열의 문인이다.

 

숙종 21(1695) 1월에 인천 현감(6, 지금의 동장 급)이 되고, 169611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인천을 떠났다.

 

이희조를 부사라고 하지 않고 현감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역모를 도모한 인물과 관련된 곳이면 고을의 지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인천이 현으로 강등 된 것은 숙종 14(1688)에 반역을 도모한 중 여환이 태어난 곳이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강등된 후 10년이 흐르면 다시 고을의 지위를 환원시켜 주었다.

 

이희조는 죽은 후에 좌찬성(1, 지금의 부총리 급)에 추증되었으며 이단상과 마찬가지로 학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이희조는 현재 관교동 문학초등학교 내에 있는 인천 관아에 도달하자 인천은 나의 아버님이 다스렸던 곳이다.

 

아버님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아직 살아있으니, 내가 만일 정치를 잘하지 못하여 마을의 연장자들에게 죄를 얻는다면, 어떻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뵙고 또한 어떻게 나의 어머니를 편안케 하겠는가? 또 인천은 인()으로 이름을 삼았으니 내가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며 아버지 이단상의 치적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전국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이 연이어 있게 되자, 정성을 다하며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백성을 구휼하는데 진력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인천의 향리들은 백성들에게 간악하고 좀먹는 짓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이희조에 대한 칭찬이 인천을 넘어 이웃의 마을까지 알려졌고, 위로는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이희조는 도리어 만족하지 않고 백성을 어질게 대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인민당(人民堂, 백성을 어질게 대하는 곳) 이라 하여 더욱 백성을 위한 정치에 힘썼다.

 

이 때 이희조는 이단상의 제자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에게 인민당의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김창협은 이희조가 인천 현감으로 백성에게 어떻게 을 실행해야 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길에서 떠돌다가 굶어 죽는 사람을 보게 되면 하루 종일 밥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않고, 바가지라도 들고 문전에서 구걸하여 밥을 얻어, 굶은 사람에게 주어서 먹게 하는 것은 누구나가 그렇게 할 수 있으니, 국가의 명을 받아 한 읍()의 백성을 다스리는데 굶어 죽는 것을 직접 보면서 불쌍히 여겨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하니, 현감의 전 날의 정치가 비록 훌륭하였더라도, 진실로 백성을 어질게 대하는 성대한 정치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평상시에도 백성을 지극히 염려하여 하루라도 백성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날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을 대함에 병이 없을 때에도 걱정하는 것이 병이 있을 때와 차이가 없게 하는 것처럼 한다면, 이러한 연후에야 백성을 어질게 대하는 뜻을 충족시킬 수 있고 마음에 아쉬움이 없게 될 것이다.”

 

요즈음 울산시청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무능·태만·불성실 공무원들에 대하여 철밥통 깨기공무원의 3%를 퇴출시키겠다하는 말들이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타율적이고 강압적인 제재가 있기 전에 공무원만이 아니라, 선거로 선출된 자방자치단제장 아니 국가를 경영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민을 위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인천부사 이단상과 그의 아들 이희조를 통하여 교훈을 얻어야 한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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