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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인물

송암 박두성 / 한글점자 창안

by 형과니 2023. 4. 1.

송암 박두성 / 한글점자 창안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1 00:39:37

 

[인천인물 100]한글점자 창안 송암 박두성

 

 

점자책쌓지 말고 꽂아.”

 

1963년 어느 날 인천시 중구 율목동 251 단층가옥 안방. 질곡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부대껴 온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1888~1963) 선생. 그가 75년 삶을 마감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신념이 담긴 한마디다.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 초가집에서 모태신앙을 안고 태어난 송암의 이름은 두현(斗鉉),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교동 박씨 집안의 두터운 믿음 속에 서울로 유학간 송암은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어의동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13년 현재의 국립 서울맹()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에 뛰어들었다.

 

'맹인'이라 불리며 사회적 천대를 받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응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송암은 시각장애인도 비시각장애인과 똑같이 직접 읽고 쓸 수 있는 한글점자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점자는 19세기 프랑스 루이 브라이유가 종이에 점을 찍어 손가락 촉각을 이용해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 이외에 한글로 된 점자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지식교육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서슬퍼렇던 일본제국주의가 한글 사용을 철저히 금기시하던 상황이어서 그의 한글점자 연구는 몹시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드디어 1926114일 송암은 한글점자의 초창기 모델 개발을 마치고 한글점자 개발을 선포했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본따 지금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송암이 가장 먼저 한글점자로 번역한 책은 성경전서였다.

 

1935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9458·15 광복 후에는 제헌의회로부터 승인도 얻었다.

 

1935년 제생원 교사를 정년퇴임한 그는 이듬해 인천에 설립된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해 한글점자 보급과 보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죽했으면 집안에 점자번역기 아연판을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한글점자 번역작업에 몰두할 정도였다.

 

그가 평생 점역한 책만 76점에 달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효과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활로를 터 준 송암이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면 직전까지도 한글점자 번역일을 그치지 않았던 민족혼과 열정을 실천한 인물 송암에겐 순봉(작고순대(작고희복(미국 거주) 세 아들과 정희(82·화가·동구 화평동 거주명희(80·산부인과 전문의·부천시 거주) 두 딸이 있다.

 

둘째 아들 순대씨의 아들 현재(62·전 인천시 학원연합회장)씨는 제물포고 3학년때 할아버지(송암)가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엄하실 수 없었다할아버지 앞에선 모든 가족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씀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송암의 생가와 교동교회는 지금 이종조카인 영재(80·원로목사)씨와 그 아들 용호(56), 그 손자 창혁(32)씨가 지키고 있으며 생가 우물에서 나오는 신비의 쓴물(일명 마라)을 퍼 올려 강화본도 창후리 선착장 앞에서 쓴물온천탕을 운영하고 있다.

 

송암은 가족들에 의해 남동구 수산동 남동구청 옆 공동묘지에 안장됐는데 최근 바르게살기운동 인천시 남동구협의회(회장·김연중)가 묘역정비사업을 펼친 뒤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송암 후손과 시각장애인들은 국가훈장을 받고 지난 2002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달의 인물로 선정된 송암을 탐구하고 기리는 연구와 향토교육이 시작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송암에 대한 잘못된 기록 '생가기념비'

 

송암 박두성에 대해 잘못된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인천시 중구가 기념물로 관리중인 '송암 생가 기념비'가 대표적 사례.

 

시와 구는 지난 19911212일 송암이 장·노년기에 거주했던 중구 율목동 251 집 앞에 '생가 기념비'를 이전 설치했다.

 

그러나 송암이 태어나 자란 곳은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8이다.

 

생가 기념비란 표현은 자칫 후세에 율목동이 송암의 출생지인 것처럼 잘못 전해질 우려가 높다.

 

따라서 생가 기념비 옆에 이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 유래와 함께 송암의 정확한 출생지를 설명해 주는 별도의 표지판을 설치, 정확한 역사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암이 숨을 거둘 때까지 거주했던 율목동 집은 송암 후손이 1994915일 타인에게 팔았고 이 때문에 기념비는 관리가 안돼 주변이 쓰레기 무단투기장으로 전락했다.

 

중구는 고민 끝에 이달 1천만원을 들여 이 기념비를 인근 율목공원으로 옮기고 직접 관리에 나섰다.

 

 

[인터뷰] 김상복 인천시각장애인연합회장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틀어 인천의 대표적 역사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송암에 대해 정작 우리 인천시민은 무지하거나 무관심해 안타까울 때가 많지요.”

 

송암 숭모사업에 십수년째 열정을 쏟고 있는 ()인천시시각장애인연합회 간상복(56) 회장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까지 정부나 시 차원의 송암 숭모사업은 사실상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형편.

 

이 때문에 연합회는 지난 199993일 인천시 남구 학익231에 인천시 시각장애인복지관을 개관하면서 복지관 1층 공간에 '송암 박두성 선생 기념관'을 직접 꾸며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기념관(032-874-3117)에는 생전 송암의 생활유품과 한글점자 번역기, 점자 성경전서, 친필 등 수백점이 전시돼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누구나 무료 입장해 송암의 일대기와 시각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다.

 

연합회는 또 매년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송암의 출생지인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 생가 앞에서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송암을 추모하고 높은 뜻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간 회장은 이제라도 정부와 시 그리고 인천시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 한국의 역사적 인물인 송암을 추앙하고 숭모하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윤관옥·oky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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