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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중화루 자리

by 형과니 2023. 4. 17.

중화루 자리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10-23 01:28:45


중화루 자리


지금 같으면 극구 막았겠지만 벌써 30년이 되었으니 애석해할망정 누구도 보존하려 나서는 사람 없었다. 중화루가 철거될 때 그랬었다. 1978년 헐리게 된다고 할 때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면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비록 퇴색한 고옥일 망정 인천을 찾는 외지인에게 보일 기념물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립된 지 110년 된 중화루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화루는 인천항의 개항 4년째인 1887년 일본인에 의해 착공, 다음해 낙성한 붉은 벽돌의 3층짜리 양옥이었다. 그것을 건축주 호리 리끼다로는 구미인을 상대하여 대불(大佛)호텔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그때만 해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기 이전이어서 인천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부득불 하룻밤 인천에서 묵어야 했는데, 그래서 호텔은 성업이었다.

우리나라에 첫 선교사로 온 아펜젤러가 바로 그 다이부쓰(대불의 일본발음)호텔에 묵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착오이다. 아펜젤러가 인천땅을 밟은 것이 1885년이었으니 대불호텔이 건립되기 이전이다. 입경이 거부된 아펜젤러는 일본에 돌아갔다가 재입국하여 서울 숙소가 마련되기까지 포장지로 얽어 만든 허름한 집에서 지냈다고 하니 그것이 맞는 이야기이다.

그후 성업중이던 대불호텔은 경인선의 개통으로 서리를 맞았다. 그것을 1918년 중국인이 매입 청요리집으 개업, 중화루라고 했다. 2층 난간 밑에 ‘차이니스 레스토랑’이라는 금박물들인 대형간판이 화려하기조차 했다. 신태범 박사에 의하면 당시 중화루에는 베이징에서 데려온 일급 주방장으로룻인해 정통 북경요리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 시절 중화루에서 요리를 먹고 싸리재에 있던 인력거를 불러 타고 귀가하는 것이 최고의 호강이라고 회고하는 노인도 있다. 그런 중화루가 구시가의 침체로 요리점도 중단되고 재산권 싸움에 휘말리어 한때 중국인 난민이 수용되더니 아예 철거라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이날까지 오물이 쌓인 빈터로 있다가 최근 판자담을 헐고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차이나타운을 장식할 소공원으로 조성하리라 한다. 중화루의 재현은 감감무소식이다.


위 치: 중구청 별관(지도가운데 빨간깃발) 왼쪽 옆 토지임(지도를 더블클릭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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