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염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20:07:48
인천 주안 염전은 해방후 1960년대 까지만해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우리 나라 최초의 염전으로 소개되었던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염전이었다. 주안 염전은 1907년 현 주안 산업단지 지역의 옛 간사지에 1정보 규모의 천일제염 실험 염전을 설치하였다. 운영해 본 결과 성공을거둠으로써 우리 나라 서해안 여러 지역에 근대적인 천일제염 염전이 확대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한 염전 개척의 선구지가 되었다.
1. 우리의 전통적 제염 방법
우리 고장은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103.8km의 해안선을 갖고 있고 또한 해안 전체가 넓은 갯벌로 되어있기 때문에 썰물이 되면 넓게 발달한 갯벌이 전부 노출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어서 일찍부터 이 갯벌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는 염벗이 많았다고 한다. 염벗이란 바닷물을 큰 가마솥에 붓고 불을 때면서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생산하는 전통적인 방법인데 이 방법이 우리 고장 서곶 해안지역에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소금이 귀하고 가격 또한 비싸기 때문에 염벗 업자들은 제법 타산도 맞아서 세금을 내면서도 염벗이 번창한 것 같다. 이러한 관계로 1900년경 인천 서곶 해안에도 80여 명의 염벗 업자들이 있었다고 하니 인천은 오래전부터 소금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2. 인천의 재제염
우리 나라는 예부터 우리 나라 소금 수요의 절대량을 생산 공급 할 수 있는 소금 생산 시설을 갖고 있지 못하여 일찍부터 청국으로부터 소금이 수입되었다. 개항 후 1885년 경부터는 우리 인천항에 일본인들이 소금을 수입하게 되면서 청국과 일본은 소금 수입경쟁이 붙어 1904년 경에는 일본인들이 청국을 따라 잡는 듯 하였으나 결국 청국소금이 워낙 싸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손을 들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들은 상술을 바꾸어 값이 싼 청국소금을 사서 재제염을 만들어 팔게 되었다. 재제염은 입자가 큰 호염을 석탄불로 다시 녹여 깨끗하고 입자가 모래처럼 고운 백색소금으로 만들어 내는 질좋은 소금이다.
처음 재제염이 시중에 나왔을 때에는 이 소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판매가 부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일상적인 식생활에 뿌리를 내리면서 일본인들의 재제염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1908년경 부터는 인천에 재제염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인천제염소, 만석제염소 등 5개 공장이 문을 열면서 우리 나라의 소금시장을 일본인들이 석권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천일제염 주안 염전 탄생
청·일의 소금이 우리 시장을 석권하자 우리 나라의 재래식 소금 생산 업자들이 소금 생산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한말 정부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외국 소금의 횡포를 막고 소금 생산 방법을 개량하여 자체 생산 능력을 증대할 수 있는 근본적인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정부는 1906년(광무10년)에 일본인 기사에 의뢰하여 우리 나라 해안에 천일제염 염전의 적지를 연구 조사한 결과 인천주안 간사지가 최종적인 적지로 선정되어 이곳에 염전이 착공되었고 1907년에 1정보 규모의 실험 염전을 개척하여 운영해본 결과, 당시 청국이나 일본에서 생산되고 있던 1등품 소금과 비교해 볼 때 품질면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좋은 소금이 생산됨으로써, 우리 나라 소금생산 방법이 근대화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안 실험염전의 성공으로 평안남도 광양만을 비롯해 인천지역의 남동, 시흥 지역의 군자염전 등이 계속 새로 생겼으며 서해안을 끼고 있는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도 많은 염전이 새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1) 주안 염전
주안 염전은 해안에서 육지로 깊숙하게 들어온 간사지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주위의 낮 기온이 매우 높고 수분 증발도 잘 되는 소금생산의 최적지로서 우리 나라 염전 근대화에 견인차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염전은 그당시 불을 때면서 소금을 생산하던 염벗 방법에 비하면 소금 생산량이나 생산비용면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혁신적인 새로운 방법이었다고 한다. 천일제염은바닷물을 수차로 염전에 끌어올려 여러 단계의 넓은 염전을 흘러가는 동안 햇빛을 받아 수증기는 계속 증발하고, 진한 소금물에서소금이 엉키는 마지막 단계에 넓은 사금파리 염판에서, 소금으로 가라앉게 되면 이를 계속 긁어 모아 건져내면 모두 소금이 되는 것이다.
소금은 겨울철이나 우기를 제외한 계절에 생산되는데 특히 건조기인 봄철이 가장 소금생산이 많다고 한다. 염전은 한꺼번에 많은 돈을 투자하여야 되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인건비 이외에 큰 투자없이 싼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우리 나라의 소금을 자급자족 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주안 염전에서는 1정보당 연 12만근의 소금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실험염전으로 시작된 주안 염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8개 구역의 염전으로 계속 확장되어 238정보의 큰 염전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1921년에는 인천지역에 300여 정보의 인천 남동 염전(현 남동산업단지 지역)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렇게 염전이 계속 늘어나면서 1921년 7월에는 담배와 소금이 국가의 전매품이 되었고 인천 주안에는 전매국 직속인 전매지국이 생겼으며 1930년경에는 경기도 전매국 인천출장소로 되면서 소금의 판매·수입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의 많은 염전을 관리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2) 주안 염전 폐염
1945년 해방당시 우리 남한의 염전은 2,951정보에 이르렀으며 연간 생산능력은 18만톤으로 국내 소금 수요량 25만톤의 70% 수준이어서 소금이 계속 부족하였고 소금값 또한 쌀값과 대등할 정도로 소금값이 좋았다. 이러한 관계로 정부에서는 민간염전 개발을 적극 권장하여 1958년경에는 우리 나라 염전 총면적이 11,580정보에 이르렀고 소금 생산량 또한 65만톤에 달해 연간 10만톤의 소금이 과잉 생산되는 결과를 갖게 되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초래되기도 했다.
소금값은 몰락하고 염전업자들은 적자 운영에 시달려야 하는 소금업계의 대불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61년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이러한 어려운 문제들을 타개하고자 보조금을 주면서 염전업자들이 스스로 염전을 폐염하도록 권장하여 많은 염전이 폐쇄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68년에는 우리 나라 염전의 효시인 주안 염전마저도 폐염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으니 인천 도시개발 계획에 의해 주안 산업단지 부지로 책정되어 주안 염전은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천 남동염전 마저도 1980년대 인천시의 새로운 도시개발 계획에 밀려 모두 사라져 그 자리에 남동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이처럼 개화기 우리 고장의 산 역사의 현장이 날이 갈수록 그 자취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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