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언론사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09-01-30 11:05:51
인천 언론사
조우성의 미추홀
"첫째 인천과 경성의 상업 현황과 물가, 둘째 조선의 국세(國勢)와 백성들의 상황, 셋째 각 지방의 여러 소식 중 상업에 관한 것 및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기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19년 전인 1890년 1월28일, 인천서 창간한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의 발간사 일부다. 게재 내용이 오늘의 '경제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돋보이는 이 신문은 인천언론사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일본인에 의해 발행된 것이지만 신문물의 총아였던 '신문(新聞)'을 싫든 좋든 인천의 지식인들에게 학습하게 한 공로가 있고 훗날 '조선신문'이란 이름으로 서울로 진출하여 우리 근대 신문의 뿌리가 됐다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정작 우리말로 된 지역지를 우리 힘으로 창간한 것은 광복되던 해 10월7일었다. 순 국문판 대중일보의 발행은 인천 지식인들의 오랜 꿈의 실현이었다. 이 신문은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으로 맥을 이었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발아기에 있던 인천 언론의 싹을 무참하게 잘라냈다. 언론 말살의 칼을 휘둘러 소위 '3사(三社) 통합'을 강제하였고, 발행지를 수원(水原)으로 옮겨가 버렸던 횡포는 씻지 못할 인천언론사의 수치였다.
최근 '인천언론인클럽(회장 박민서)'이 그 영욕을 낱낱이 기록한 '인천언론사'의 출판기념회를 라마다호텔에서 가졌다. 지역 최초의 언론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아직 부침을 계속하고 있는 언론 현실을 재삼 각성시키는 자리이기도 했다. 언론이 바로 서야 비로소 인천이 명품도시가 되리라는 상념도 떠나지 않았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