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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48시간의 작은 전쟁

by 형과니 2023. 5. 30.

48시간의 작은 전쟁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9-07-12 21:32:24


48시간의 작은 전쟁

“그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석전으로 응전했다. 창과 칼로 우리를 상대하는데 그나마 없는 적수공권의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우리 눈에 뿌렸다. 모든것을 각오한 그들은 한걸음 한걸음 포위하여 다가오는 적군에게 오로지 죽기로 싸웠다. 그리하여 사살당하는가 하면 물속으로 떨어져 죽기도 했다. 부상자는 거의 투신자살했는데 그들 중에는 먼저 스스로 제 목을 찌른 다음 물속에 뛰어들기도 했다. 부상으로 포로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그렇듯 조선군은 비록 패했으나 이름없는 병사들은 용전했다. 패배자의 용맹성과 기백을 두고 승전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른바 신미양요에서 우리 측은 어재연 장군 이하 350명이 사상했으나 미국 측은 매키 중위등 10여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다. 방금 남북전쟁을 겪고 난 미군이었다. 신미양요는 그 미군이 대동강에서 셔먼호 사건을 항의하고 통상을 요구, 1871년 4월 내침한 강화도 광성진에서의 전쟁을 말한다. 양요란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란이라는 뜻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승전했으나 우리나라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3주가 지나 스스로 장수기 등을 노획하여 퇴거했다.

싸움에서는 이겼으면서도 명분없는 이 전쟁을 그들은 자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승리는 승리였으나 누구 한 사람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으며 누구 한 사람 기억에 남기고 싶어하지도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뉴욕 헤럴드도 ‘이방국과 우리의 소전쟁’이라는 제하의 보도에서 48시간의 한미전쟁을 이렇게 결론하고 있다. “전투에는 승리했다. 그러나 외교에 실패했다.”

격전을 치른 역사의 현장은 지금 강화군 불은면에 광성보라는 이름으로 격류의 바다를 내려다 보는 언덕에 소재한다. 그곳에는 당시의 성곽과 포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어재연 장군 형제를 기리는 쌍충비각과 그들을 제외한 51명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7기의 분묘 등이 합장되어 있다.

오는 9월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가 그 현장에서 재현되리라 한다. 인천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마련하는 행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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