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대청도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 재발견
2009-11-14 13:55:14
눈썹 그리는 먹처럼 ‘검푸른 섬’
(42) 대청도
대청도(大靑島)는 인천으로부터 서북쪽으로 211㎞, 백령도(白翎島) 남방 12㎞ 거리에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 최서북단으로 휴전선 밑에 자리한다. 옛날에는 대청(大靑), 소청(小靑) 두 섬을 뭉뚱그려 그냥 청도(靑島), 곧 ‘푸른 섬’이라고 불렀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는 노정을 적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대청서(大靑嶼)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黛]과 같다 하여, 고려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도 이 섬을 ‘푸른 섬’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4년에 간행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포을도(包乙島)를 청도(靑島)라 하는 것은 서긍의 글을 옮긴 듯하다.
푸른 섬을 우리 음에 따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쓴 것이 포을도이고 이것을 다시 뜻에 따라 한자로 기록한 것이 청도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를 지나는 배들이 모두 ‘푸른 섬’이라고 부른 것이 확실하다.
또 대청도를 암도(岩島)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대청도의 섬 주위가 모두 암벽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시대 대청도는 죄인의 유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죄인뿐만 아니라 당시 원나라 황실 황태자까지도 유배를 왔다고 한다.
국내인으로 대표적인 유배 기록이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평정한 무신 김방경(金方慶)이 모반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던 기록이다.
원나라 사례로는 충렬왕 6년 원제(元帝)가 황태자 애아역(愛牙亦)을 대청도로 귀양 보낸 것으로, 그에 관련해서는 1996년에 발간된 ‘옹진군향리지(甕津郡鄕里誌)’에 “유배 당시의 궁궐터가 내동초등학교 터였다고 하며 내동(內洞) 지명을 고쳐 장안(長安)으로, 그리고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러 이곳을 자기의 도읍지라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한낱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대청도가 서해의 포경업(捕鯨業) 전진 기지였다는 사실이다. 1904년 서해 어업권을 침탈하고 대청도 선진포(船津浦)에까지 접근해 고래를 잡던 일제는 1918년 마침내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차리고 광복 때까지 포경선 5~6척을 두어 연간 30~40두의 참고래를 잡아 우리 서해안의 참고래의 씨를 말렸다. 1926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체에서 잡은 포획 양의 절반인 무려 60마리의 고래를 대청도 근해에서 잡았는데, 1944년에는 불과 13마리에 그쳐 참고래의 씨가 말라감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청도에는 우리나라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라는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이로써 대청도가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의 한계 지역이라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군사, 행정적으로 대청도는 원래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에 소속되었다가 조선 정조 23년(1799)에 수원부(水原府)에 편입되었는데 수비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대청과 소청에 각각 진(鎭)을 설치하고 수원부의 장교 중에서 진장(鎭將)을 임명하여 1년 씩 근무하게 하였다. 8·15광복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옹진군에 소속되었는데, 1995년 옹진군 전역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으로 편제되었다.
이 푸른 섬 대청 앞바다에서 지난 10일 남북 해군이 교전을 벌였다. 7년 만에 또 다시 무력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원인은 북쪽에 의한 불법 경계선 침범이었는데, 어업 전진기지로서 국방의 전초 기지로서 대청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다.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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