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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람들의 생각

고향이 외면한 미술가의 죽음

by 형과니 2023. 6. 5.

고향이 외면한 미술가의 죽음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9-11-29 22:40:51

 

고향이 외면한 미술가의 죽음

기 고

 

한국 1세대 미술 평론가이자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석남 이경성 선생이 26일 미국 뉴저지주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1940년 일본 와세다 대학 법률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고인은 평론가와 교육자, 그리고 미술 행정가로 일생을 살았다.

 

그는 해방 뒤 일본인 소유 문화재 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인천시립박물관 건립을 주도하고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이어 그는 이화여대 미술관과 홍익대 박물관 건립을 주도했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이전을 총지휘했다.

 

이경성 선생은 1981년 문화공보부 관료들이 도맡던 국립현대미술관장 자리에 민간 전문가로는 처음 부임하여 미술관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인은 독자적인 이론을 세운 미술 비평가이기도 하다. 근대 미술을 서구 사조 이식론과 자주적 근대화 역량론의 두 축으로 풀어냄으로써 후대 평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결성하여 후배들이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하고 '미술입문'(1961), '한국근대미술연구'(1975), '한국근대미술의 흐름'(1988),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1998), '망각의 화원'(2004)20여권의 저서를 냈다.

아울러 그는 파행적으로 운영되던 국전의 민전 이양을 주도하고 석남 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젊은 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등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그였지만 그의 만년은 쓸쓸했다. 10여 년 전에 부인을 먼저 보냈지만 외동딸이 결혼 후 미국에서 살아 여의도 아파트와 평창동 노인병원 등에서 홀로 말년을 보냈다. 더구나 2001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를 져야했다.

 

필자가 당시 미술잡지사 기자로 여의도 석남 자택을 방문하자 그는 "화가 이대원은 늙어서도 그림을 그려놓으면 화랑에서 가져가는데 나는 글 써 달라는 사람도 없어, 그러니 그림을 그리게"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한 게 기억난다.

 

그는 워낙 천성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인색하고 낙천적인데다가 베푸는 성격이다 보니 만년에는 경제적으로 불편했던 모양이다.그래서 인천 문화계 일각에서 석남을 인천으로 모셔오자는 캠페인이 잠시 있었다. 석남선생도 이에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어른을 여관에 모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결국 그는 평창동 노인병원에 가서 요양하다가 2006년 따님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엊그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석남은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 시절에도 인천에서 기차로 출퇴근 했고 몇 년전 인천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인천을 사랑한 한국미술계의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그를 외면했고 이국 땅에서 쓸쓸히 영면하고 만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시립일랑미술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자고로 예술가의 가치란 단순한 기예나 경력의 화려함으로 포장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혼이고 정체성이며 역사이자 또 다른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라는 것은 아마도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인간적 됨됨,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인간적 향취, 그리고 남의 가치를 자기 것 보다 존중하는 배려심 등 인간으로서의 풍모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의 아우라를 형성하며 존재하는 인간, 그런 예술인이 대접받는 인천은 언제 도래할 것인지.

/이경모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