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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전망차

1907년의 인천

by 형과니 2023. 3. 17.

1907년의 인천

인천의문화/오광철의전망차

2007-02-05 09:10:10


1907년의 인천


역사서의 연표를 더듬어 올라가면 대사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대개 백년이거나 한 갑자의 60년 주기이다. 이같은 사실을 보면서 흥미로움을 느끼는 한편 역사의 교훈이 절실해지기도 한다.

100년전-1907년 정미년의 한해도 그러했다. 그해는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급박하게 변전하고 있었다.

헤이그 평화회의의 밀사 파견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러나 군대해산은 항일의병의 발단이 되었다. 그 대표적 사건의 하나가 강화진위대의 봉기이다.

강화진위대 봉기는 그해 8월9일에 있었다. 소집명령에 영문도 모르고 집합한 대원들은 주위에 나타난 일본 헌병들을 보고서야 해산식인줄 짐작케 되었다.

급료를 주며 무기를 반납토록 하자 격분한 50여명의 병사들이 주민의 호응을 얻어 무기고를 습격하고 친일 군수와 일진회 간부를 처분하는 한편 서울에서 파견된 일군과 접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군의 증파와 화력의 열세에 밀려 강을 건너 내륙의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결국 진위대의 봉기는 사흘 동안에 붕괴되었다. 하지만 강화진위대의 주력은 국치 후 만주와 연해주 등지의 국외 독립전쟁의 선도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강화군내에서 격렬했던 1919년의 3·1운동에 영향했다.

1907년은 인천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들로 분주했다. 그해 봄 신흥동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 400호가 전소했으며 창영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이완용이 주안염전을 시찰했고 황태자 이은이 일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천주교회 사료에 나오는 신창동의 일본인 토지에 정착한 유민들이 지주의 횡포로 생활의 터전을 잃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도 그해 7월이었다.

신창동은 지금의 신흥동 일대이며 묘지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역사물을 고구하다 보면 자료의 부실이 절실히 느껴진다.

그러면서 그만한 자료라도 기록자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난감했을까를 생각케 된다.

아주 작은 한 줄의 기록이라도 그것은 사실을 규명하는 단서가 되고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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