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챠이나타운의역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3 09:03:33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4월 청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체결이 된 후로 화교들이 몰려와 생성 되었습니다. 북성동, 선린동 일대의 5천 평에 청국의 영사와 학교가 설치되고, 중국의 산동반도와 정기적으로 배가 운영되면서 화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식료잡화, 소금, 곡물을 팔고 우리나라의 사금 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상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이 마비되면서 화교들은 대만,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나고, 일부는 요리집과 잡화상들을 운영하거나, 일부는 부두근로자로 전락하기도 했답니다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각종 제도적 제한, 차별대우로 화교 사회는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더불어 1949년 중국정부가 설립되어 외국이동을 금지하면서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화교 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중국의 큰 명절인 설날과 원소절(보름날)사이의 15일 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 였으며,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어 놓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 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겨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현재 화교 2·3세들이 1백 70여 가구 500여명이 살고 있으며, 자금성, 중화루, 진흥각등이 중국의 맛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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