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여고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0 18:45:19
박문여고
[우리학교 최고]인천 최초의 여사학 박문여고
인천 박문여고(인천시 동구 송림동 103의8)의 교명은 논어의 '박학어문(博學於文)'에서 발췌했다.
학문을 널리 익혀 도(道)에 이르는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학교 이름에서부터 심오한 교육철학을 담고 있는 셈.
박문여고는 지난 1940년 일제치하에서 인천 최초의 여사학으로 출발했다.
그 만큼 전통을 자랑하면서 명문 여성 교육기관으로서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홍익인간의 이념과 함께 진·선·미와 가톨릭의 덕성을 갖춘 여성을 키워낸다는 게
학교설립의 목표였다. 지금까지 배출한 이들만 3만여명에 달한다.
박문여고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에 둔 인성교육을 통해 사회의 '씨알' 노릇을 하는
여성일꾼들을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설립 이념 및 목적을 충실히 따르면서 모든 교과과정을 운영한다.
교육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을 정도로 알차다.
박문여고는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자율과 참여를 통해 학교공동체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청소년기 올바른 인격형성을 돕고자 애를 쓴다.
그 중에 먼저 교사와 학생 사이에 활성화한 토론문화를 꼽을 수 있다.
집단사고 및 책임을 공유할 각종 학교운영협의회와 교사 동아리의 활동을 통해
교육과정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춘 여성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학생자치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올해로 8대째를 맞고 있는 학생회는 학생들이 직접 대표를 뽑아 운영하면서 명실공히 학생자치기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학교측에서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학생회는 또 학생들간 합의로 규칙을 제정하고 실천하며, 다양한 자치 부서를 조직하고
운영함으로써 규범과 책임을 스스로 체험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학부모가 교육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간 상담을 정례화하고 있는 것도 박문여고의 특징.
이와 함께 학부모의 날, 주간, 달을 운영하면서 학생에 대해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학부모들이 자원봉사, 명예교사 등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도록 돕고 있다.
박문여고는 특히 인성교육 목표를 실현하기위해 다른 학교와는 달리 한 학년당 17~18개 과목을
10과목으로 대폭 축소해 입시부담을 줄인 교육과정을 운영,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가장 큰 특징은 '교과수준별 이동수업'. 개인별 학력차에 따라 학생의 능력에 맞게
학습내용을 선정, 지도하는 이 방안은 학습 성취도를 극대화하는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박문여고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전인교육은 체험학습. 이 학습은 주당 3교시씩 4주동안 실시된다.
학급활동부터 전일제 특별활동, 인성교육 및 교육강좌, 공동체험학습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 스스로 진로를 탐색하고 건전한 학생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박문여고는 교육목적을 극대화하기위한 특색사업에도 힘을 쏟는다.
1학년때 실시하는 '수양회'는 7월에 1박2일 일정으로 합숙여행을 함으로써
학생들 사이의 친밀도와 공동체 의식을 높여주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2학년 때는 교양과 도덕 함양을 비롯 우리 문화·전통을 사랑하고 계승할 사명감을 갖도록
학생들이 소단위 그룹토의와 나눔을 통해 원만한 대인 관계를 맺게 하는 '수정제' 행사를 갖는다.
이어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들에겐 성윤리관과 결혼생활, 가족계획 등과 관련해
실생활 중심으로 지도하는 '행복한 가정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학교측은 주 1회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명상의 시간'을 마련해 모든 학생들이 맑은 심성을 가꾸게 돕는다.
이같은 인성중심의 교육은 학생들이 학력은 물론 다양한 과외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례로 많은 학생들이 지난해 열린 전국 외국어 경시대회와
고교백일장, 미술대회, 풍물경연대회를 휩쓰는 등 쟁쟁한 실력을 과시했다.
박문여고는 전통적 유교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장석우선생(1870~1941)이 1940년 5월 8일 사재를 털어
현재 인천송림초등학교 자리에 '인천소화고등여학교'를 세우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평 조병창에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거리가 멀다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교사를 부평으로 옮긴 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6년 8월 다시 송림동 교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장선생의 아들 광순씨는 광복후 1945년 9월 30일 당시 천주교회 서울교구장이었던
노기남 주교에게 재단과 학교를 양도했고 지금은 노틀담수녀원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