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군, 덕적면
인천의관광/인천의섬
2007-03-13 09:40:12
옹진군, 덕적면
▲ 덕적면 굴업도 해수욕장
옹진군의 지명 유래
옹진군 지명(북도면,송림면,백령면,대청면,덕적면,자월면,영풍면)
옹진군은 원래 황해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황해도 지역이 한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옛날고조선시대 부터이며 고조선 이후 한사군시대에는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
그후 830년 경에는 완전히 고구려의 영여긍로 편입되었으며 이때부터 옹천홀이라 불렀음을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옹천홀이라는 이름은 옹천성(일명 화산산성)이 독을 눕혀 놓은 모양 같고 성밖은 급경사로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는데 이 성의 특징을 따서 옹천(독벼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황해도 지역은 한산주에 속해 있었고 옹진 역시 한산주에 편입되었는데
고구려때의 지명인 옹천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지역이 신라의 중심부와 많이 떨어져 있는관계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듯보이나
백령도는 신라와 당이 왕래했을 때 황해 항로상의 중간기지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고려시대에는 백령도에 진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군대가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령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군사적 목적보다는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한항로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을 것이다
지금도 백령도 진촌에는 토성지가 남아 있고 그 주변 경작지에는 고려의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진촌이라는 지명도 진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백령도는 고려 전시기에 걸쳐 자주 유배지로 이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대청도는 충렬왕 이후 모든 몽고인의 유배지였다고 하는데 현종 9년에 옹진이라고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에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는 옹진군의 일부였으나 조선초 백령도는 장연군에,
대청도와 소청도는 옹진현에 남아 있었으나 다시 장연군에 편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왕조의 지방 통치제도가 근대적인 행정구역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옹진군에는 군수가 파견되었다.
그 후 1909년에 다시 개편되었으며 8.15해방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8.15해방과 함께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자 국토분단의 슬픔은 옹진군의 행정구역을 변하게 하였다.
옹진읍을 비롯해 많은 마을과 면은 황해도로 편입되었고
38도선 이남에는 옹진군과 연백군만 남게 되었는데 이를 경기도의 관할로 변경하였다.
이 후 옹진지역은 군사적으로 기필코 방어해야 할 곳으로 인식되어 많은 전력이 투입되었고
북한과 자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때 딱벌단, 백골단, 서북 청년당 등 유격대들이 활동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사각지대나 다름이 없었던 웅진지구는
'피의 옹진'이라고 불리울 만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후퇴하고 철수하였다.
사곳항에는 옹진반도에서 철수해 온 병력과 민간인들이 뒤엉키어 있었으나
우리 국군의 철수 작전에 따라 다시 인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중공군의 개입에 대규모 정규전은 없었으나
옹진 청년 학생들은 6.25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옹진의 자유를 위하여 대공토쟁을 해 나갔는데
그들이 바로 역사에 남을 웅진하도 유격대원들인 것이다.
1951년 1.4후퇴시에는 임시군청을 인천에 소재한 부천군청에 설치하여 20여개 도서의 난민구호 행정을 실시하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성립 후 휴전선이 생김에 따라 백령도를 비롯한 대청도, 연평도, 소연평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수복지구가 되었으며 1962년 6월 14일백령면 대청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행정구역의 대대적인 작업으로 부천군에 속해 있던 영종, 북도, 용유, 덕적, 영홍, 대부면이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이는 부천시가 급격하게 팽창함에 따라 서해 도서에 대한 행정이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백령면과 송림면뿐인 옹진군의 크기가 너무 작아 인천연해 도서지역을 합하여 관할하게 한 것이다.
1974년 대청 출장소가 대청면, 1983년에 영흥면에 속해있던 자월 출장소를
자월면으로 승격하여 옹진군은 10개면, 3개 출장소, 124개 서해 도서로 팽창하였다.
1975년에는 인천 신홍동에 종합청사를 신축하여 오늘날 옹진 행정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1989년 1월에 영종면과 용유면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고,
1994년 12월 22일 대통령령 제 14434호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대부면이 안산시로 편입 (94.12.26)되었으며 옹진군의 영역은 7개면, 2개장소로 줄어들었다.
또한 법률 제 4802호(94.12.22)에 의하여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로 다시 편입된 옹진군은 그 지역 특성상 수도권의 해상방위 및
경인지역의 수산물 공급처, 해상관광의 휴식공간, 그리고 서해안 개발의 요충지로
앞으로 크게 발전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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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면
덕적면 지역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원삼국시대를 지나 삼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백제의 대중국 교통로상의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중국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부터 이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금강 유역의 공주로 천도하던 475년까지 100여년 동안 사용된 중국과의 교통로는
능허대 (이천시 남구 옥련동)에서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황해를 횡단하고 중국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에 이르는 항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곳은 중요한 항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간의 한강 유역 장악을 위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한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게 되어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여 고구려가 장악했던 한강유역의 옛땅을 회복,
551년에 덕적면 지역이 백제의 세력 아래 들어 갔으나, 2년후 신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덕적면 지역은 신라의 관할아래 놓이게 된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중국의 직접 통할 수 있는 통로의 확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된다.
신라는 이를 계기로 남양만에 당항성이란 요새를 설치하여 중국의 남진,
북제와 사신을 교환하고 외교를 강화, 삼국 통일의 기초로 삼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덕적도는 덕물도로 나오고 있으니, 660년 6월 18일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군사와 함께 산동반도의 내주를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정박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덕적면 지역은 신라 진흥왕이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남양에 당항성을 쌓아
중국과 통교한 553년이래 줄곧 당항성이 있는 당성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성군의 지명이 수차 바뀌어 신라 경덕왕 17년에는 당은군으로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옛이름으로 복구하여 수주의 속군으로 삼았다가 뒤에 인주로 내속하였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고 충렬왕 16년(1290)에 흥당구의 내향이므로 익지주사로 승격시켰다가
다시 강령도한부로 34(1308)에는 익주목으로 승격시켰는데 충선왕 2년(1310) 목을 모두 폐합에 따라 남양부로 격하되었다.
이때 남양부에는 덕적면을 비롯하여 대부면, 영흥면, 자월면을 포함한 지역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때부터 덕물도라는 지명 이외에 덕적도, 인물도 등의 표기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덕적도는 덕물도 외에 덕물도,
득물도 등으로도 표기하였는데 용비어천가에 보면 고려 말 왜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중'덕적'의 이름 아래
'덕물'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덕적'으로 쓰고 읽기는 '덕물'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자를 써서 '인물도'라 고도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덕물도라는 뜻은 '큰물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이 지역을 '수심도'라고도 썼는데 이것 역시 덕적도의 원이름이었던 '큰물섬'에서 온 것이라 생각된다.
즉 덕적도란 큰물, 깊은물, 즉 크고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덕적면은 옹진군에 속한 면으로 본래 남양 도호부에 속했던 것으로 성종 17년(1486)인천부로 옮기면서 덕적면이라 하게 되었다.
덕적면에는 진리, 올도, 익포, 우포, 불리, 소야, 문갑, 백아, 승봉, 굴업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근면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법률 제2597호에 의하여
옹진군에 편입되는 동시에 익포리와 우포리를 합하여 서포리라 하여 9개리를 관할하다가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 11027호에 의하여 승봉리를 자월면에 넘겨주어 8개리가 되었다.
▶ 덕적도
덕적도는 인천항에서 70.4km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면적이 20.66km에 해안선의 길이가 36km에 이르는 덕적면의 중심 섬이다.
이 섬은 원래 덕물도라고 했는데 이것은 '큰물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이 지역을 '수심도'라고도 썼는데 이것 역시 덕적도의 원이름이었던 '큰물섬'에서 온 것이라생각된다.
즉 덕적도란 큰 물, 깊은 물, 즉 크고 깊은 바다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덕적도에는 자연부락으로 진리, 북리, 서포리가 있다.
진리는 본래 남양부 덕적면의 지역으로 1652년 효종 3년에 덕적도에 최초로 둔영을 설치,
곤대가 주둔시켜 만호를 두었다가 17-8년 숙종 34년 수군첨절제사로 승직시킨다.
그 후 1756년 영조 32년 초대 첨사가 부임한 이래 진영이 설치되어 이 마을을 '진리'또는 '진촌'이라 했다 한다.
조선 시대 성종시에 인천붕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꿩말', 도우, 박주름,
샘골, 어루끄미, 이개를 병합하여 진리라 했다.
덕적면 북리는 본래 남양부 덕적면 지역으로 덕적 첨사진에 속했으나 1894년 갑오경장으로 첨사진이 폐지되고
인천부에 이속되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능골, 큰숙개, 소재,
작은 쑥개를 병합하여 덕적도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리'라 하였다.
서포리는 덕적도의 서쪽에 위치한 포구라는 의미로 서포리라 했다고 하며,
주위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해수욕장으로도 널리알려진 곳이다.
특히 주위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해당화 및 등곷이 무성하게 피어나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감투모양으로 생긴 '마투 바위'와 선녀와 신선들의 놀이터를
장사들이 돌을 날라다 만들어 놓았다는 '장사 신선 바위'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 소야도
덕적면 소야리를 이루고 있는 이 섬은 원래 '새곶섬', '사야곶섬', '소의도', '소야도', '사야곶도', '소야도' 등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이 섬은 그 생김새가 새의 나는 모양과 같다하여 '새곶섬', '사야곶섬' 등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섬을 '소야도'라 하는 것은 통일 신라시대 태종 무열왕 7년(660)당의 소정방이
백제 정벌 함대를 이쓸고 이 섬에 정박한 일이 있어 이 섬을 소씨 노인이 물던 곳이라하여
한자음으로 바꾸어 '소야도'라 했다고 한다.
이 섬은 원래 두 개의 산지가 연결되어 있어 남동해안과 남서 해안을 제외하고는
넓은 간사지 끝에 암초열을 형성하여 천연적인 방조제의 구실을 하고 있어
소정방의 함대가 머물기에 적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 섬이 소야가 머물렀던 곳으로 소야도라 한 것을 알 수 있다.
▶ 문갑도
덕적면 문갑리를 이루고 있는 이 섬은 덕적도의 남쪽 8km의 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그 모양이 문갑처럼 생겼다 하여 문갑섬 또는 문갑도라 불러왔다고 한다.
문갑도는 본래는 남양부 덕적지역으로 조선조 성종때 인천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백아도
덕적면 백아리는 덕적 본도에서 약 14km정도 떨어진 서해상에 위치한 섬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원래 남양부 덕적면의 지역으로 조선조 성종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천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섬의 모양이 흰 갈매기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백아리라 했다고도 하며,
섬의 모양이 마치 먹이를 노리고 입을 벌리고 있는 흐니 상어의 이빨 부분과 같다고 하여 '백아'라 했다고도 한다.
▶ 굴업도
덕적면 굴업리를 이루고 있는 이 섬은 덕적도 서남도 13km거리에 있으며 인천항과는 82km가 떨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부터 성어기에는 민어 어장으로 유명했고 갯벌이 넓어 굴이 많이 나기로도 유명했다.
특히 이 섬은 산마루까지 토질이 모래로 되어 있을 정도로 주위의 갯벌이 희고
가는 모래로 되어 있으나 식수가 부족하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는 많은 주민들이 이웃 섬이나 인천 시민들의 반대로 취소되기도 한 섬이다.
이 섬은 사질로 구성되어 있고 농경지가 전혀 없어
처음 이곳에 정착해 온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척박한 땅을 일구고
야산을 개간하여 채소, 땅콩 등을 재배하는 등 생활의 근거지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땅을 파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하여
이 섬을 '굴어보'했다 하기도 하고,
섬 모양이 사람이 구부리고 엎드린 형상이라 하여'굴어보'라 했다고 하기도 한다.
▶ 선미도
이 섬은 덕적도 북단에서 500m 떨어진 면적이 1km도 못되는 아주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원래 산세가 험악하여 '악험도'라 불러 왔고 지금도 이 섬에는 등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등대를 '악험등대'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1937년 이 섬에 등대가 설치되면서 아름답고 착한 섬이 되라는 뜻에서 '선미도'라 부르기도 했으나 '선미도'로 통칭되고 있다.
▶ 지도
덕적면 백아리 동쪽 약 13km떨어진 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섬의 중앙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연못이 있는 섬이라하여 '연못섬'이 한자로 기록되면서 못'지'자를 써서 '지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울도리
덕적면 울도리는 덕적 본도에서 약 17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울도와 내도(바지섬)와 목덕도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원래 남양부 덕적면의 지역으로 조선조 성종 때 인천부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옹진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섬 주변에는 많은 무인도가 있어 이 섬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
울섬'이라 하던 것이 '울도'로 한자 표기된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이섬에는 사람들의 인심이 너무나 좋아서 이 섬에 들어오는 사람은 들어올 때 울고
울고 왔으면서도 또한 나가게 될 때는 너무나 서운해서 울면서 나갔다고 하는 데서 '울도'라 했다고도 한다.
동고령 또는 똥고개
덕적면 진 2리와 서포 2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 200m가랑이나 되는 높은 산을 넘어가는 고개이다.
그런데 이 고개를 서포리에 바라보면 항상 동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라하여 한자로도 '동고령'이라 했고,
보통사람들은 이 고개를 일러 '동고개'를 센 발음으로 하다 보니 '똥고개'가 되어 이를 별칭으로 '똥고개'라 한다고 했다.
▶ 국수봉
덕적면 북리와 서포리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은 해발 312.7m의 고산으로 덕적도내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제일 귀한 산이란 뜻으로 '국수봉'이라 했다고 한다.
이 산위에는 주위가 약 30m높이가 약 7-8m의 제천단이 잇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소정방이 이 섬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제천단을 쌓고 이 곳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여지승람)에 보면 임경업장군이 이곳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
이 섬의 국수봉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인천부사에서는 덕적도 북쪽 긑에 있는 국수봉은 진나라 시황제가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하여
서시로 하여금 동남동녀 500인을 보내어 영약인 국로를 발견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고 적고 있기도 한 산이다.
이 산에는 1950년대부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세워(1951년 3월 15일)놓고 산상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으나
1982년 군부대에서 중계탑을 이 곳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뻐꾹산
덕적면 북리에 있는 이 산에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어 이 산의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 전설을 보면 옛날에는 어느 어부가 소형 돛단배를 만들어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고기잡이 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며 살아 가던 어느날 남편이 다리를 다쳐 자리에 누워 식음을 전폐한다.
부인은 남편 보기가 애처러워 무슨 음식으로 식욕을 돋울까 궁리 긑에 안개가 눈앞을 가리는 날
굴을 따기 위해 바다로 혼자 훌쩍 떠났는데 부인이 바닷물 위에 떠밀려 죽은 시체로 나타나자
남편은 통곡을 하며 양지바른 산 언덕에 무덤을 만들었다.
몇 해 지나자 무덤은 바닷물과 해풍에 의해 산 언덕이 깎이자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대,
묘를 파헤치자 뻐꾹새 한 마리가 무덤 속에서 파드득하고 바다쪽으로 날아갔다. 그
러므로 그 후부터 이 산을 일러서 '뻐꾹산'이라 해 오게 되었다고 한다.
▶ 용담
덕적면 서포리에 있는 이곳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이곳에서 바다용이 나타나 어부들을 당황하게 했다.
주민들은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가서 바다용에게 제사를 지내야만 했다.
용에게 제사를 지내던 연못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용담'이라 햇다고 한다.
현재는 이곳에서 우럭, 장어가 잘 잡혀 낚시 동호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 호맥이
덕적면 북리에 있는 이곳은 바닷물이 만조가 되면 거센 물결이 교차되는 곳이다.
이 곳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옛날에 한 고기잡이 배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물 속에서 용이 휘어 감듯 물이 소용돌이쳐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이 때 많은 어부가 생으로 떼죽음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랑이처럼 무서운 곳이라 하여 이곳을 '호맥'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뻐국천
덕적면 뻐국산 밑에 있는 개울로 뻐국새가 많이 날아 들어 우는 산이라하여 뻐국산이라 했고
이 뻐꾹산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개울이라 하여 '뻐꾹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왕주물
덕적면 북리에 있는 우물로 어느 시대 어느왕 때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피난을 하던 중
이곳을 지나게 된 임금님께서 목이 말라 식수를 구하던 그 때 신하가사방을 두루 찾아 본 후
이 우물을 발견하여 대왕께 물을 더다 바쳐 목을 추기고 온 신하가 이 물을 달게 마셨다
하여 이후로 이 우물을 왕이 마신 우물이라 하여 '왕주물'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삼신샘
덕적면 문갑리의 깃대봉 봉우리에 있는 우물로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사람들은 아기를 낳게 되면 관례적으로 이 우물에 가서 물을 떠 놓고 빌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 우물에 삼신할머니가 계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삼신할머니가 계신 우물이라 하여 '삼신샘'이라 불러 오게 되었다고 한다.
▶ 중의절굴
덕적면 문갑리에 있는 이곳은 깃대봉 봉우리 삼신샘의 서남족에 있는 굴을 말하는것으로 옛날 한 중이 삼을 캐러 다녔으나
삼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삼신샘에서 물을 떠다가 이 굴에서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렷다고 한다.
불공을 드리던 중은 그만고단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그 때 비몽사몽간에 머리가 아홉이나 달린 괴물이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다.
중은 이 사움이 불리할 것같아 피하려 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달려들어 싸움을 벌리려 하다가 그만 개고 보니 꿈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에 산삼이 세뿌리가 잇어 캐고보니 세줄기로 되어 머리가 아홉 개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중이 있던 중이라 하여 '중의절굴'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선돌바위
더적면 진리에 있는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잇다. 옛날 박씨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들어와 농토를 만들기 위하여 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런데 밭을 일구느라 땅을 파면 팔 때마다 잔돌멩이 수도 없이 튀어 나와 너무나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해서 밭을 일구어 나갔다.
잔돌이 튀어 나오면 하나 하나 주어서 한곳에 쌓아 놓았다.
다음 날도 또 그렇게 하고 자꾸만 일을 했지만 잔돌은 도깨비처럼 심술을 부렸는지 매일 밭에 가득가득했다.
그래도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했더니 어느 날 하루는 그렇게 많이 주어다 쌓은 놓은 돌무더기는
어디론지 간곳이 없고 그곳에 어디서 생겼는지 커다란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한 그는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열심히 일을 해서 밭을 일구어 나갔다.
그런데 그 큰돌이 생긴 이후부터는 그렇게 많던 자갈들이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사라지게 되어 옥토를 일굴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자연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법, 박씨는 그 후 옥토로 일구고 그 선돌 밑에서 점심을 먹으며 일하다 쉬기도 하고
바위와 일평생 벗하며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자로 잘 살다가 새상을 떠나게 되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선돌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장사바위
덕적면 소야리에 있는 이 바위는 소야도에서 약 500m쯤 떨어진 곳에 우뚝 솟아 있다.
그런데 그 생긴 모양이 장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바닷가에 굴을 따고 있는 데 덕적도에서 제일 가는 장사가 육지로 가기 위해 물위를 걸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 여인의 뱃속에또 다른 장사가 하나 잉태되어 있었다. 물위를 걸어 오던
그 장사는 그만 그 여인의 뱃속에 있는 또 다른 장사를 보고 너무 놀라 그만 그 자리에서 선채로 굳어져 돌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 여인의 뱃속에 있던 장사로 태어날 아기도 그만그 장사가 굳어져 돌이 되는 것에 놀라
장사로 태어나지 못하고 보통사람으로 태어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섬에서 태어 날 장사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 애석함을 지닌 바위로 장사가
굳어진 바위라 하기도 하고 또 그 모양이 장사같이 생겼다 하여 '장사바위'라 하게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 선단여바위 도는 선대암
덕적면 백아리에 있는 이 바위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덕적도에서 멀리 떨어진 백아도에 노부부와 남매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노부부가 하루 사이에 모두 죽게 되었다.
그러자 인근 외딴 섬에 홀로 외로이 살던 마귀할멈이 여동생을 납치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외딴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후 십여년이 흘러 장성한 오빠는 홀로 조각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 풍랑을 만나 어떤 섬에 정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어여쁜 처녀를 발견한 총각은 사랑을 느끼게 되어 둘은 마귀 할멈이 없는 틈을 타서 사랑의 밀회를 즐기게 되었다.
서로 이루어 질 수 없는 남매의 사랑을 개탄한 하늘은 선녀로 하여금 그들의 관계를 설명해 주게 하여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남매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함께 죽는 편이 좋겠다고 고집하므로
하늘은 이들에게 천둥과 번개를 때리게 하여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남매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았던 마귀 할멈을 모두 죽여 버리고 만다.
그 후 그곳에는 세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오빠바위', '누이바위', '할미바위'라 하고,
도 다른 이름으로는 선녀의 말을 믿지 못하고 고집하다 벼락을 맞아 선녀들이 너무 안타까워
붉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 하여 '선녀단'이라 하던 것이
점차 변음되어 '선단여바위'로 불리게 되어 한자로는 '선대암'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내고장 향토교육 길라잡이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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