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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인천학강좌> 열일곱 번째 이야기 (完) < 우각리(牛角里)라는 곳

by 형과니 2023. 6. 4.

인천학강좌> 열일곱 번째 이야기 () < 우각리(牛角里)라는 곳

인천의문화/인천학강좌

2009-10-09 12:49:11

 

창영동 양관인천의 선교본부

> 열일곱 번째 이야기 () < 우각리(牛角里)라는 곳

 

 

쇠뿔고개라 불리던 숭의동과 창영동 언덕은 송림동 로터리와 독갑다리(숭의동 평양옥 인근)까지 산허리의 중간쯤이다. 고개의 형국이 구부러진 소의 뿔과 같아 쇠뿔고개라 불렸고, 한자로는 우각리(牛角里)라고 했다. 오늘의 창영교회와 인천세무서에서 전도관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오광철 인천신문 고문은 인천학강좌에서 우각리라는 곳, 창영동42 선교사 저택 일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우각리와 인천 기독교사를 재조명했다.

 

쇠뿔고개는 개항 당시 서울을 오가는 경인가도(京仁街道)의 구실을 했으며 인천에서 서구 문물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주한 초대 미국공사를 지낸 알렌 선교사의 별장이 세워졌고 1897년 경인철도가 개통됐다. 1907년 인천 최초의 공립보통학교인 창영학교도 세워졌다.

 

1892년 아펜젤러가 한국을 떠나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이자 내리교회를 담임한 존스 선교사는 선교기지로 삼기도 했다.

 

감리교회는 1895년 인천을 주목했고 우각리40~41 일대 토지를 매입한다. 존스는 1897년 그 곳에 목사관과 교회당을 건립해 애즈버리(선교사·1745~1816)라 명명했다. 존스 선교사는 1900년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그 동안 우각리의 작은 예배당과 주택을 개조해 교회로 썼다. 그러나 애즈버리 예배당도 비좁아 1901년 공사가 미처 끝나지 않은 내리예배당으로 복귀하면서 그 건물은 영화여학교에서 사용하게 됐다.

 

1902년 애즈버리 예배당과 목사관에 화재사건이 발생했고, 소실된 목사관은 1904년 신축했다. 이듬해 여 선교사들이 생활할 건물도 신축했다. 고풍스런 르네상스식의 건물로 오늘날의 인천시 지방문화재 18호인 선교사 저택이다. ·여 선교사 저택과 아펜젤러의 사택이 우각리 언덕에 자리하면서 향토사학자 최성연은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선교사들의 별천지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일대는 30년대 들어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거듭났고 영화여학교와 영화유치원, 창영초가 자리해 교육 거리로 활기를 띠었다. 내리교회는 1934년 영화유치원에서 선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주일학교를 개설했고 1937년에는 인근에 창영교회도 창립했다.

 

일제 말에는 한국 교회에 대한 박해가 노골화됐다. 1940년 한국 내 선교사들을 추방한데 이어 1945년 교회 폐쇄령도 내렸다. 일제 당국이 애즈버리 일대를 곱게 볼리 없었고, 1942년쯤 분쇄하려는 음모를 획책하기도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6·25 전쟁 이후 50~60년대 선교사 저택은 기독교사회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저택은 구조가 일부 변형됐지만 현재 인천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오 고문은 개항기 인천에서 활동한 외국인들의 흔적을 찾아 기록을 발굴하고, 창영동의 양관(문화재) 표기를 선교사 저택으로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자료와 기록은 부실해도 외국인들은 기록과 사진, 서신이 풍부하고, 선교사 숙소로 불리우는 창영동의 양관은 그들의 생활관이며 선교본부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환직기자 slamhj@i-today.co.kr

 

오광철 인천신문 고문 = 19357월 인천 출생. 인천일보 편집이사, 인천일보 상무 겸 주필, 인천일보 사장 역임. 현 인천신문 고문. 저서 시사칼럼집 장미를 주는 손. 1976년 경기도문화상 언론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