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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8. 요릿집 화선장

by 형과니 2023. 6. 19.

28. 요릿집 화선장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6-24 11:46:27

 

 

 

화선장(花仙莊)은 한때 인천의 대표적인 일본 요릿집으로, 경양식집으로,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경인간에 크게 이름을 날렸던 집이다. 내동의 중소기업은행 인천지점(이곳도 통상 신포동이라고 이른다) 건너편, 지금은 커피 집 카페 베네가 된 옛 정흥택(鄭興澤)의 생선전(生鮮廛) 자리에서 중앙동을 향해 왼쪽으로 구부러져 내려오다가 소위 신포동 칼국수(수제비) 골목으로 들어서는 오른쪽 첫 2층집이 옛 화선장 건물이다. 지금은 ‘The’라는 간판을 단 맥주 집으로 변해 있다.

 

우동집으로서는 신포동에 있던 龜屋(가메야)가 유명했다. 7전 하던 가케우동과 단팥죽, 빙수로 벌어들인 돈으로 30년대에 일본 요정 成金(나리낑)으로 발전한 것이 현재 화선장 바로 그것이다.

 

귀옥의 음식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위의 글은 고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저서인천 한 세기중 간식(間食)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화선장의 내력을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어서 인용한 것이다. 반세기를 넘어 60년도 훨씬 전, 일제 때 이야기여서 그 음식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분은 아마 지상에 없을 듯 싶지만, 이 화선장이 일제때부터도 유명했던 음식업소였던 것만은 짐작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사진은 대략 1960년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중앙의 흰색 임치과 건물 오른쪽 끝의 일본풍 검은색 2층 건물이 화선장이다. 오른쪽의 옛 신광약국 간판과 전신주 옆으로 희미하게 성공회 성당으로 올라서는 언덕길이 보이고 길 오른쪽 옆 가파른 물매를 가진 2층 기와집이 오늘날 금강제화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이다.

 

이날도 역시 높으신 분들의 회식이 있었던 듯하다. 화선장 앞과 건너편 도로를 여러 대의 지프 승용차가 점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렵까지는 대부분의 관용 차량이 지프형 승용차였다. 지프 뒤에 휘발유 5갤런 들이 스페어 깡을 단 것이 이채롭다. 시기적으로 어쩌면 군사혁명이 난 얼마 후였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이날도 역시라고 말한 것은 이 무렵 인천의 고관이나 서울에서 내려온 높은 분들은 청요리집을 찾지 않을 경우, 으레 회식 장소로 여기 화선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선장은 이 신포동에서도 특히 고관이나 상류층만이 출입하는 최일류 요릿집이었던 셈이다. 지프차 밑에 깔린 그림자의 길이로 보아서는 점심 회식연이 틀림없어 보인다.

 

 

두 번째 사진은 1975년 이후의 화선장 모습이다. 점포 앞에 정거한 포니 승용차는 1975년에 처음 시중에 운행됐기 때문이다. 10여 년 상간이지만 이때는 화선장도 변모해서 2층 창문이 전부 유리문으로 개조되고 1층과 2층 사이의 작은 처마도 사라지고 없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주 메뉴도 어느덧 일식과 경양식에서 1970년대 당시 새로운 먹을거리로 유행하기 시작하던 주물럭과 곁들이 냉면으로 바뀌었다. 이때쯤이면 젊은 여성들이 호사스럽게 서비스하는 요정풍의 고급 한정식 집들이 생겨나 점차 고관, 거물들의 발길을 그리로 잡아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0년

세 번째 사진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일찍이 그 유명했던 청요리집 공화춘, 중화루가 단 한 번도 들어가 앉아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 화선장 역시 끝내 일식이든, 경양식이든, 또 주물럭이든, 어느 음식도 맛을 보지 못한 채 주인이 떠나고 거리가 변하고 옥호(屋號)마저 이처럼 전혀 과거를 짐작할 수 없이 바뀌어 새로운 업소가 되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당시 화선장에 얽힌 한두 가지 기사거리를 한담(閑談)처럼 적으면서 아쉬운 세월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9621022일자 경향신문 기사가 웃음을 자아낸다. 그 당시만 해도 이렇게 어수룩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음식점 울린 거짓 주문(注文)”이라는 제목의 인천발 기사인데 () 서무계장(庶務係長)을 사칭해서 하루 세 군데 업소에 피해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요즈음 인천 시내에서는 인천시청 서무계장을 사칭하고 음식점과 다과점 등에 대량으로 음식을 허위 주문함으로써 음식점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괴이한 일이 연발하고 있어 인천시 당국은 앞으로 이런 자가 적발되면 엄중히 처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인천시내에서 있었던 허위 주문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18일 인천시 중앙동에 있는 화선장 양식집에는 30 전후의 청년이 나타나 자칭 시청 서무계장이라 하고 도시락 240개를 주문했다. 화선장에서는 납품일자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 당국에다 전화를 하였더니 허위주문이 탄로되어 만들어 놓은 240개의 도시락은 밑졌다 한다.

 

같은 날 시내 신포동에 있는 미락(美樂) 양식집에도 청년이 나타나 같은 방법으로 도시락 2백 개를 주문하고 사라졌다. 같은 날 동인천 역전 평화다과점에서는 인천시 총무계장이라 하고 빵 5천 개를 20일까지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이 뚱뚱한 친구는 수표를 주겠다고 한 후 사라졌다. 주인은 5천 개의 빵을 만들 재료를 사 놓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 시청 총무과에 조회하여 보았더니 그런 사람이 없다는 통지. 이래서 도시락 440개와 빵 5천 개는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소행은 한 사람이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대체 그 청년은 무슨 못된 심사로 이런 짓을 했는지, 또 아무리 그 시절 인심이 순박했다 해도 세 군데 음식점과 빵집 주인들이 어쩌면 그런 대량 주문을 일 푼의 의심도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자못 의아하다.

 

또 한 가지는 19659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주한 미 7사단장 존슨 장군과 화선장 주인 김진원 씨와의 인연을 소개한 기사이다. 역시 경향신문 1966719일자에 실려 있다. 제목은 못 잊어 코리어로 그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존슨 장군은 2차 대전 당시 소령으로 참전했는데 1942년 여름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3년여 동안 남양군도의 여러 섬으로 전전했던 장군은 광복되던 해 인천 포로수용소로 옮겨 오게 된다. 포로수용소의 위치가 지금의 신흥동 326번지였다. 일본군의 학대와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존슨 장군은 7월 어느 날, 강제노동에 끌려 나가던 도중 동료 세 사람과 탈출한다.

 

골목, 골목으로 한 2km 정도 도망친 곳이 시내 한복판 신포동에 일본사람 대포(大浦)가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 나리낑[成金] 앞이었다. 이들은 다짜고짜 뛰어 들어가 손짓 발짓으로 헝그리(배고프다)’를 연발했다.그때 한 종업원이 이들을 재빨리 구석방에 숨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나 존슨 장군은 음식을 얻어먹고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가 다시 일본군에 붙잡혀 버렸다고 한다. 그때 이들에게 음식을 준 주인공이 바로 화선장 주인인 김진원 씨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일본의 항복과 함께 미 7사단의 인천 상륙으로 장군은 인천수용소에서 구출되었고 다시 20년이 지나 이번에는 그 7사단 사단장으로 한국에 배치된다. 그러면서 존슨 사단장은 그때 일을 못 잊어 인천에서도 제일 호화로운 경양식 집을 차리고 있는 김진원 씨를 찾아 부엌문에다 존슨 키친(존슨부엌)’이라고 사인을 해 주었다는 내용이다.’ 인천의 호화 음식점 화선장이 주한 미군 한 장성과의 이런 미담 일화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19751224일자 동아일보는 화선장 종업원들로 구성된 이색 식당 축구팀이 창단 18개월 동안 855231패의 우수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1970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부인 송 여사가 식당을 맡아 운영하면서, 워낙 남자처럼 활달한 성격으로 웬만한 직장이면 조기 축구팀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 식당에서도 축구팀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종업원들에게 축구공을 사다 주고 새벽마다 나가서 공을 차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축구팀 이야기도 인천 최초이자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되며,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릇 인간의 일은 그 어느 한 가지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 것인지, 인천의 대표적인 음식점 화선장도 한때의 영화를 뒤로 하고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는 생각을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들여다보며 해 본다.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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