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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29. 송도유원지

by 형과니 2023. 6. 20.

29. 송도유원지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7-14 23:47:08

 

70년대의 송도에서 어느 화목한 가정

 

 

1963년 개장 월미도 폐쇄 여파 행락객 바글바글

29. 송도유원지

 

송도유원지는 근래까지도 인공 해수 풀장을 가진 경인간의 유일한 임해 휴양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원지 앞의 바다가 전부 매립되어 풀장은 마치 육지에 갇힌 연못 꼴이 된 데다가, 또 워낙 첨단 시설의 고급 풀장이나 임해 해수욕장이 각지에 많이 개발되어 행락객의 발길이 거의 끈기다시피한 낙후 유원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난 시절, 한여름이면 풀장의 물보다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콩나물시루를 연출하던 것은 이제 추억의 한 장이 된 셈이다.

 

연수구 옥련동 송도유원지 자리는 청량산 자락이 남쪽 바닷가로 흘러내리다 멈춰, 아마도 옛 능허대 배후(背後)처럼 작지만 부드럽게 만곡(彎曲)을 이룬 지형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에 제방을 쌓아 바다를 막고 육상 경기장처럼 긴 타원형의 인공 해수 풀장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수문이 설치된 남쪽 끝의 아주 작은 섬 형상의 돌출부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유원지로 변모하기 전에는 해송, 청송이 우거진 매우 뛰어난 해안 풍광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명승지를 놓칠 리 없는 일제가 월미도 이상의 일급 유원지로 송도유원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것이다. 거기에 수인선이 1937년에 개통되면 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의 행락객을 유치할 수 있는 이점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벌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본격적인 유원지 건설이 지연되다가 급기야 전쟁 패배와 퇴각하고 1963년 결국 우리 손에 의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휴전이 되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군과 영국군 부대가 유원지의 서북쪽 육지 쪽에 주둔해 있었지 않았나 싶다. 미군이 유원지 일대 상공에서 고사포 사격 훈련을 했던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글라이더 같은 경비행기가 꼬리 끝에 가는 줄로 길게 매단 황갈색의 장방형 타깃을 끌고 유원지 앞바다 상공을 선회하면 인근의 고사포 진지에서 사격을 가해 맞추는 훈련이었다.

 

당시만 해도 인천은 인총이 드물고 빌딩도 자동차도 거의 없어 한낮이라도 소리가 잘 들렸던 까닭에 타타타타하는 먼 고사포 소리를 숭의동 집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연달은 사격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에 검은 점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박히다가 이내 풀어져 연기처럼 사라지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호기심 많고 극성스런 또래들과 능허대 어귀까지 달려갔다가 때마침 어느 고사포가 비행기 꼬리에 달린 그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켰는지 황갈색의 낙하산이 활짝 하늘에 펼쳐져 떨어지는 장관을 보기도 했다.

 

실제 송도유원지에 들어가 본 것은 1961년 중학 2학년 시절에 열렸던 인천시내 중고등학교 보이스카우트 잼버리대회 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본 유원지 풍경은 물이 거의 다 빠진 드넓은 웅덩이 형태의 풀장 하나와 백사장과 유원지의 남동쪽에 길게 벋은 제방과 그 건너편에 앉은 주먹만 한 섬 아암도뿐이었다. 제방 끝부분의 섬 형상의 돌출부에는 풀장에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수문이 굳게 닫힌 채 있었고 거기서부터 출입구 쪽으로 청량산 끝자락 휘움한 육지 부분을 울창한 숲이 감싸고 있었다. 그것이 유원지 풍경의 전부였다.

 

우리의 캠핑은 아암도를 건너다보는, 나무가 드문드문 선 유원지 내 인공 백사장에서 열렸다. 풀장의 물은 오래도록 갈지 않아서 밤중에 졸아붙은 물속에서 파랗게 빛을 내는 야광 물것들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지도 선생님의 주의대로 수영은 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62년 어느 여름날, 당시 유행하던 소위 트위스트라는 춤도 이 송도유원지에서 처음 목격했다. 아직 유원지는 이름뿐으로 해수욕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날도 그냥 백사장을 어슬렁거리는데 사복을 입은 미군들이 기타를 치며 한쪽 발뒤꿈치와 다른 쪽 발의 앞코로 땅을 비비거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비트는 이상한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것이 트위스트였는데 그 이름은 물론 후에 들어서 알았다.

 

인천 사람으로 송도유원지에 대한 추억은 수없이 많지만 문득 1972년 불의의 사고를 당해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타계한 조한길(趙漢吉) 시인의 팔각정 매점이 생각난다. 아암도를 건너다보고 있던 그 매점 앞 테이블에서 고 최병구(崔炳九), 손설향(孫雪鄕) 시인들과 함께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얻어 마시던 멋있는 추억도 떠오른다. 그러나 그 멋있는 추억을 위해 신포동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실없이 뽀얀 흙먼지를 쓰고 걸어갔던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여기서 송도유원지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앞에서 간단하게 언급을 하긴 했지만,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자. 정식 송도유원지 조성 사업 개시는 19364월 일본인 나가이(永井市太郞)를 대표로 한 송도유원주식회사(松嶋遊園株式會社) 설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사의 설립 목적이 해수욕장 및 유원지의 경영, 별장 및 주택지의 경영, 별장 및 주택의 건설 임대 및 공사 청부, 전 각항에 부대하고 관련하는 사항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조선총독부 관보 193946일자에는 동년 330일에 경기도 인천부 송도정 소재 해면 98,016평을 송도유원주식회사가 유원지 조성을 위해 매립 준공했다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 유원지 일대 별장 부지까지 포함된 넓이일 것이다.

 

유원지 조성 사업과 관련해 송도 일대 땅값이 크게 오르기도 했었던 것 같다. 1935115일자 동아일보는 이에 대한 경계성 기사를 싣고 있다. “인천부의 송도 부근은 작동(昨冬)만 해도 매평(每坪) 3,4전 내지 6전까지 하던 것이 불과 1년이 못된 금일에는 매평 180전 내지 2원으로 상승일로를 밟고 있다는데……운운하며 이 원인이 악덕 브로커의 역선전, 즉 송도 부근 일대가 피서지가 될 것이라는 선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송도유원지 조성에 대한 소문은 이미 1930년대에 들면서부터 인천 시중에 퍼져 있었던 듯싶다.

 

동아일보는 당시 일본인들의 속셈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인지 이 피서지설은 수년 전부터 전해 오는 것으로 그저 막연히 된다는 것이지 현재의 월미도가 큰 변동이 없기 전에는 아직 교통조차 편리치 못하고 조수의 이(潮水)까지 충분치 못한 그곳이 수년 내로 유원지가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5개월 후인 그 이듬해 4월에 송도유원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이 기사 말미에서 동아일보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송도 일대 땅을 사둔 중소 상인들이 전전긍긍한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당한 상인들은 동아일보처럼 아마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지적한 교통 문제도 이미 해결되었던지 1939627일자 신문은 상인천(지금의 동인천)에서 송도를 다니는 버스 노선의 운영권은 송로차부에서 경전(京電)으로 넘어가 운행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다.

 

초기의 송도유원지에는 바닷물을 가두어 담은 대형 해수욕장과 간단한 무대 시설, 그리고 어린이 놀이터 와 운동장 및 동물원, 간이 호텔 등이 들어섰다. 그러나 월미도에 비교해서 여러모로 뒤졌기 때문에 그다지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병풍처럼 둘러선 청량산의 산세와 광활한 공간이 펼치는 자연 그대로의 쾌적한 환경만큼은 월미도를 능가하고 있었다. <중략> 일본은 송도 유원지 건설을 계획하고 초기 단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더 이상 투자를 하지 못해 점차 퇴보의 길을 걸으면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또 다시 6·25전쟁을 겪게 되고 유원지는 더욱 황폐화되었다.”

 

이상은 공저 간추린 인천사에 나와 있는 송도유원지의 대략적인 풍경이다. 그 후 1961년 국정(國定) 관광지로 지정되어 본격적인 개발 작업이 진행되면서 1970년대 말까지 유원지로서 크게 각광을 받는다.

 

“1960년대에 이르러 흥한재단(興韓財團)이 국정 관광지로 지정된 송도유원지의 재건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인천시와 공동 투자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25천 평의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제반 시설을 정비한 후 1963년 여름에 지금의 송도유원지를 개장했다. 월미도가 폐쇄 상태였던 터라 송도유원지는 이후 약 10년간 유일한 임해유원지로 경인간의 행락 인파가 운집하는 곳이었다.”인천시사는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1962523일자 경향신문은 군사혁명의 주인공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인천의 도시 및 간척 계획과 항만 시설을 시찰하는 도중 민간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송도유원지의 관광 건설 계획을 듣고 군 장비를 동원하여 이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는 기사도 싣고 있다.

 

이후 송도유원지를 포함한 인근의 매립지에 대해서 대우건설, 한독실업 등이 수차에 걸쳐 개발 계획을 신문지상에 발표하곤 했으나 오늘날까지 미루어져 오다가 최근 인천시도시계획위원회가 남구 학익동ㆍ연수구 옥련동ㆍ동춘동에 걸쳐 있는 송도유원지 부지를 재개발하는 송도관광단지 개발계획을 통과시켰다.

 

과연 송도유원지 일대가 이른바 도심형 관광단지로 재탄생하여 가족과 연인들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최적의 유원지로, 또 인천시민은 물론 수도권 주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의 명소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는지. 김윤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