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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31. 그 시절 인천-몇 장의 여름 풍경

by 형과니 2023. 6. 21.

31. 그 시절 인천-몇 장의 여름 풍경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8-06 11:02:42

 

삶의 애환 담긴 흑백사진 속 '그시절 인천 여름날'

31. 그 시절 인천-몇 장의 여름 풍경

 

 

이제 그만 퍼부어도 좋으련만 하늘은 오늘도 여전히 폭우를 내리 퍼붓고 있다. 우리 인천 소재 인하대 여러학생들의 젊음을 앗아간 춘천 참사, 또 우면산 산사태 말고도 아직 무엇이 더 부족하다는 말인가. 84까지는 이 모양이고 그리고 그 후에는 저 밑에서부터 또 하나, ‘무이파인가 하는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옛날 같으면 장마는 대개 7월 하순 무렵에 들면서는 어김없이 그쳐 늦어도 24, 5일경부터는 맹렬하게 땡볕이 내리쬐어 바야흐로 피서철의 피크를 이루곤 했었는데 근래에는 기후가 변해 영 틀려버렸다.

 

인천에서도 대체로 727일에서 82, 3일까지의 한 주일 정도가 섬에서 지내는 절정기였다. 인천 앞바다 덕적도나 무의, 용유도 해수욕장 물은 84, 5일만 지나면 한낮의 가장 더운 시간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 벌써 몸에 선뜩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변함없던 그 시절 날씨였다.

 

그런데 지금은. 장마는 이미 끝이 나고, 오늘이 벌써 7월 그믐날인데도 하늘은 계속 장대비만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 모두가 우리가 마구 파괴한 자연으로부터 되돌려 받을 수밖에 없는 보복이라니 두렵기만 하다. 물론 이러다가 개고 나면 그야말로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끓는 듯한 찜통 더위가 여러 날 두고 기승을 부리리라.

 

아무튼 각설하고, 게재된 사진들이 앞에서 말한 인천 앞바다 섬에서의 피서 풍경은 아니더라도 또렷하고 순조로웠던 그 옛날 여름 날씨가 그려낸, 몇 편의 가슴 찡한 서정문(抒情文) 같은, ‘여름 풍경들을 통해 그 시절 우리 인천의 모습을 잠시 회상해 본다.

 

 

중구 율목동에 율목풀장이 생긴 것이 1970년대가 아닌가 싶다.(몇몇 기록은 1970년이라고 못박기도 한다.) 당시에는 송도유원지가 그나마 인천 유일의 시설을 갖춘 수영장이었다. 그러나 워낙 시 외곽이어서 왕래가 불편하던 차에 시내 한복판에 신식노천 민물 풀장이 생긴 것이다.

 

신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송도유원지와는 달리 시멘트 구조의 풀이었기 때문이다. 풀은 그러나 규격 없이 무작정 넓게만, 사람이 많이 입수(入水)할 수 있게만 설계된 것이었다.

 

틀림없이 어느 민간업자의 발상이었을 터인데, 당시는 인천의 중심지 중·동구 지역 주민을 겨냥해 그 한복판에 풀장을 건설한 것이다. 1960년대 중후반인가, 파라다이스호텔(구 올림포스호텔)에서 이미 투숙객을 위한 노천 풀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업자의 예상대로 이 민물 노천 풀장은 일반 대중에게 얼마간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 간격이 뜨게 운행하는 덥고 짜증나는 콩나물시루 시내버스를 타고 먼지 길을 몇 십 분씩 달려야 하는 송도유원지보다는 시내 한복판 율목풀장이 백 번 편리했던 것이다.

 

입장료도 송도에 비해 조금은 비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송도유원지의 경우 입장료와 왕복 교통비가 드는 데 비해 율목풀장은 교통비가 절약되는 점을 업자는 분명히 계산에 넣어 올려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 송도유원지 왕복에 걸리는 시간과 번거로움의 해소 역시도 업자의 원가 개념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율목풀장은 여름 한 철, 적지 않은 수영객들로 몇 해 동안은 큰 인기와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사진 속에 보이는 풀장 풍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수영객이 젊은 남성들이라는 점이다.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풀장이다 보니 여성들은 이웃집 남성들 앞에서 차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기가 몹시 거북했던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이런 내외하는 풍습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다시 공원으로 변해 오늘에 이르지만 한말(韓末)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소유지였다가 다시 일인 공동묘지 자리로 그리고 공원으로, 풀장으로, 다시 공원으로 변한 이곳 율목공원. 사진 상우단(上右端)의 숲 뒤에는 옛 시립도서관에 얽힌 추억도 아련하기만 하다. 이 사진은 1980년대 중반 옛 인천일보 박근원(朴根遠) 부장이 촬영한 것이다.

 

 

지금은 이 같은 아이스크림 노점 행상이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1960~70년대 여름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더위를 식히는 목적보다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 때문에 더 이끌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늘에 비해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아이스케키와 더불어 여름철 대표적인 빙과류의 하나였다.

 

아이스크림은 오늘날처럼 큰 식품회사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시내에 산재해 있는 소위 무슨 당, 무슨 당 하는 아이스케키집들에서 만들었다. 아침 일찍 행상들이 리어카를 끌고 가 아이스크림을 받아다가는 목이 좋은 길가 아무데서나 팔았다.

 

가끔 위생 문제가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눈에 띄면 곧 먹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여름철 명물이었다. 동그랗고 오목하게 생긴 아이스크림 전용 스푼을 써서 퍼 주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납작한 주걱으로 과자처럼 먹을 수 있는 크림 컵에 떠서 주던 아이스크림!

 

공장 비슷한 건물이 있고 마차와 달구지를 끄는 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성동 어디쯤인지, 아니면 동구 어느 길목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따라 꼬마들마저 다 물가로 나간 듯 보이지 않는다. 행인 하나 없이 한적해서 졸음에 겨운 행상은 비치파라솔 아래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

 

내려쓴 모자, 그 아래 감지 않은 듯한 머리카락, 침침한 색상의 위아래 복색, 그리고 뒤축을 눌러 신다 벗어놓은 검은색 운동화, 거기에 주인과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초라한 아이스크림 리어카, 크림 컵 진열장 유리 한쪽에 붙은 영업허가증! 청년처럼 보이는데 불거진 광대뼈 때문인지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그가 연출하는 여름 풍경이 사뭇 무겁게 느껴진다. 인천 어디에 살던 사람인가. 아직도 살아 있는가.

 

이 또한 지난날 인천의 대표적인 한 여름 풍경인데, 얼른 보아서는 피식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반 벌거벗다 시피 한 인부들이 양곡 산더미 위에 쓰러져 누운 모습 때문이다. 누워 쉬는 인부들의 그림자가 옆으로는 거의 드리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태양이 남중(南中)하는 한낮, 점심시간 무렵인 듯하다. 어쩌면 지금 막 점심을 끝내고 남은 자투리 시간인지도 모른다.

 

과거 밀, 보리, 혹은 옥수수 따위의 곡물이 수입되어 인천항에 도착하면 사일로 같은 저장 시설이나 자동으로 운반하는 기계 장치가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인부들이 손으로 퍼 담아 차량에 싣는 수밖에 없었다. 그 양곡을 하역하는 넓은 마당에 땡볕을 가릴 만한 차단막이나 지붕이 어디 있으랴.

 

 

아래쪽 모로 누운 사람은 아예 가마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벗은 배가 상당히 나오고 넓적다리도 굵어 비교적 건장해 보인다는 점이다. 반면에 오른쪽 상단의 두 사람 중 머리에 깍지를 낀 사람은 점심을 먹었을 텐데도 배가 대조적으로 몹시 홀쭉하고 갈비뼈가 앙상하다. 아무리 평평하게 누웠다 해도 너무 말랐다. 아예 뜨거운 양곡에 몸을 파묻어 지지고 있는 자세가 아무래도 미심쩍다.

 

문득 인천 작가 현덕(玄德)의 소설 남생이의 주인공 노마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는 인천항 소금 하역 인부였다가 고된 노동 끝에 폐결핵에 걸려 죽는다. 1930년대 인천항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사진 속 인물이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이들 인부들의 덥고 힘든 여름 풍경 때문에 어느새 입가에 머금었던 웃음기는 사라지고 숙연해진다. 사진작가 김용수(金溶洙) 선생이 이 사진을 찍었는데, 차라리 연출작품이었다면 마음 편하게 웃어넘길 수 있을까.

 

 

 

마지막 사진은 1960년대 말까지 볼 수 있던 여름날의 인천 풍경이었다. 광활한 염전지대 둑길을 가다보면 염부(鹽夫)가 마른 염전에 해수를 끌어 넣기 위해 이렇게 수차를 돌리곤 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피부마저 절어 드는 듯한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차를 돌리는 인부의 걷어 올린 흰 홑바지와 저고리가 오히려 경쾌하다.

 

그러나 1969년 주안공단을 착공하면서 이 풍경과 함께 소금 인천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허옇게 염기 어린 염전 둑길과 그 옆 소금기차와 녹슨 소금창고와 노을 속에 보랏빛으로 타오르던 함초 무리들.

 

옛날 인천의 여름은 이렇게 서글픈 듯, 고단한 듯, 삶의 페이소스를 담은 몇 장의 서정문 같은 가슴 찡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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