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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32. 기독병원

by 형과니 2023. 6. 21.

32. 기독병원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8-31 13:36:55

 

반세기 넘게 이어온 인술과 믿음의 씨 뿌리기

32. 기독병원

 

 

기독병원은 꼭 몸이 아프지 않아도 일상 "경동 싸리재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긴담모퉁이가 있다."는 식으로 언급되곤 했다.

 

그러니까 시내에서 길이나 위치를 말할 때는 흔히 이 병원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렸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병원이 중구 율목동 옛 인천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어 워낙 유명했던 탓도 있었지만, 종합병원으로서 1952년 개원 초기부터 '서양의 신 의술과 최신 의료기기, 그리고 기독교 봉사정신' 같은 이미지가 시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던 까닭에 훨씬 먼저 일제 때 세워진 '도립병원(인천시립병원의 전신)'이나 적십자병원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져 은연중에 그렇게 발설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자체도 다 지난날의 이야기일 뿐으로, 인천 토박이나 과거 인천서 오래 산 사람들 정도가 기억하는 일이다.

 

더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싸리재니 긴담모퉁이니 하는 지명이 도무지 어디를 지칭하는 소리인지 알아듣지를 못할 것이고, 또 병원도 기독병원보다는 새로 생긴 다른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이 더 가깝게 느껴질 터이다.

 

진료·선교·교육이라는 지표 아래 인천기독병원이 중구 율목동 237번지에 문을 연 것은 1952526일이었다. 그러니까 내년 526일이 설립 60주년이 되는 환갑날이다. 인천기독병원 50년사에는 병원의 태동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50510일 강석봉(姜錫鳳), 황인표(黃仁杓) 의사 두 사람과 창영감리교회 장기진 장로 그리고 간호보조원 2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초대 교인처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잊을 수 없는 기도회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성실히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숭엄한 사명을 지닌 개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기도회는 전화(戰禍)의 잿더미 위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병원을 설립하려는 창조적 기도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기독병원의 태동은 그 전 해인 1951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난지 부산에서 있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에서 정신적 황폐와 더불어 육체적으로 부상을 입었거나 병들어 신음하는 전재민들을 구료(救療)하기 위해 제일 먼저 병원 설립을 과제로 삼아 인천, 강화, 천안 등 세 곳에 병원을 세울 것을 결정한 데서부터라고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이보다도 훨씬 앞서 병원이 설 수 있는 토양이 다져지고 있던 역사가 있다. 바로 병원 자리에 19231년간 인천에 주재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Kostrup, 한국명 高壽道)이 개설한 일반 진료소가 생겨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의 개원, 그리고 1931년에 인천부인병원(Women's Clinic)이 개원 사실이 그것이다.

 

기독병원 2층 입원실 계단

 

최초 인천기독병원은 바로 그 인천부인병원의 70여 평 낡은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 일제는 1940년 겨울 태평양전쟁 발발로 미국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 재산이었던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일본 패망 후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자국 여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하면서 재 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음 문을 연 병원이어서 정문에 걸린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라는 간판도 함께 걸렸었다고 인천기독병원 5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황해도 벽성군 출신인 강석봉 초대 원장 이하 여러 멤버가 이북 출신이거나 북쪽에서 의료 생활을 하던 인연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초라한 최초 병원이 크게 이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새로 도입한 X-ray기 때문이었다. 도입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6·25 전쟁 중에 출발한 병원이니 재정이나 의료 시설이 태부족해 원조에 의지하지 않고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세 해 이상 전쟁이 계속되었던 터여서 영양 부족과 불결한 환경으로 인해 각종 전염병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폐결핵에 걸린 환자가 만연하던 때였다. 휴전 직후인 195310, 때마침 인천에 온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 모스(Dr. Barbara Moss) 선교사가 이 같은 한국 사회 현실과 함께 기독병원에 X-ray기 한 대가 없는 열악한 환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외과 의사였던 모스는 즉시 자국 선교 본부에 긴급히 장비를 요청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기독병원에 최신식 200MA X-ray기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일원에서 이 같은 최신 의료 설비가 있는 곳은 기독병원이 유일했다. 출범 초부터 인천기독병원에 대한 성가(聲價)가 높아진 것은 바로 X-ray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X-ray기 도입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꼬리를 물어 인천, 경기 지역은 물론 심지어는 충청도 지역에서까지 환자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병원과 다른 여러 종합병원이 생겨나 옛날 같은 명성은 다소 퇴색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인천 지역 사회, 나아가 경기도 지역에 펼쳐 온 인술(仁術)과 믿음의 씨 뿌리기 60년은 두고두고 우리 인천 역사에 남을 것이다.

 

▲1971년 기독병원 전경

 

이 사진은 1971년에 찍은 것으로 당시 병원 전면 모습이다. 이 병원을 후에 다시 개축하고 거기에 다시 두개의 동을 더 지어 오늘날의 거대한 모습을 갖추었다. 초기 무렵에는 중심지이기는 했어도 사방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율목동 주거지역이 병원 증축 등에 제약이 많아 숭의동이나 현 제물포역 지역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재정 여건으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그런 아쉬운 사연 속에 증축된 병원 모습을 담은 것으로 당시 병원 앞길은 골목이라고 하기에는 넓은 느낌이지만 차량이 통행하기는 다소 비좁은 길이었다. 정문을 지나 왼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병원이 끝나는 데서 오른쪽으로 율목공원으로 오르는 조용한 길이 나오고, 그대로 직진하면 그 유명했던 인천도나쓰집이 나온다. 이곳을 드나드느라고 참으로 무수히 기독병원 앞을 오가던 생각도 떠오른다.

 

인천도나쓰 밑의 돌계단을 내려서면 기와집이 늘어선 율목동 새 동네 길과 싸리재로 내려서는 비탈길, 또 경동 뒷길 주택가 통하는 골목 등 몇 갈래 길을 만난다. 근래 소방도로를 뚫는다, 주택 재개발을 한다 해서 옛 길, 옛 집이 보여주던 낯익은 풍경은 모조리 다 사라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시 병원 앞을 지나 오른쪽 길로 나온다. 불과 몇 발짝 가지 않아 이내 동인천역에서 싸리재를 지나 긴담모퉁이로 가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그 길, 현재 중구선관위가 있는 자리쯤에 아마 김내과 의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 옆에 나란히 일본식 건물에 정원이 있던 김외과가 있었고. 그리고 지금 병원 주차장 인근까지는 의수, 의족 등 의지(義肢)를 취급하는 기공소 같은 곳도 몇 있었다.

 

동인천쪽으로 내려가면서 만나는 네거리 모퉁이의 상업은행 인천지점, 그리고 애관극장 방향으로 좀 치우쳐 있던 조흥은행 인천지점 모두가 헐려, 이제는 추억 속에 흐려져 간다.

 

기독병원이라면 문중의 먼 친척 아저씨뻘로, 고 김인수(金仁守) 선생이 생각난다. 이 분은 동구 창영동 출신으로 영화매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기독청년회 고등과를 졸업했는데, 후에 기독병원 서무과장을 맡아 병원 행정 확립에 크게 공헌한 분이다. 서무과장으로 재직하면서 특히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 관계를 유지, 군원(軍援)을 통한 병원 시설 확충에도 크게 이바지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인천의 초등학교 최초로 창영초등학교에 소년단을 창설하는 등 소년운동에도 평생 헌신하기도 했다.

 

이런 큰 병원을 구경해 본 적도 없었는데, 1959년 고모님 댁 큰누나가 첫아이를 출산할 때 아저씨의 배려로 누나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 병원에서 순산했고, 2층 입원실에서 며칠 입원해 있는 동안 이것저것 심부름을 다니면서 처음 들어가 보았다. 작은 사진 왼쪽 끝에 보이는 층계가 바로 2층의 입원실로 올라가는 통로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천의 중심지인 율목동 부촌 한가운데 자리잡은 채 인천의 대표적인 종합 의료기관으로 명성을 떨치던 기독병원! 인천의 중추적인 의료 시설로 여전히 공헌하고는 있지만, 싸리재니, 긴담모퉁이니 하는 인근의 잊혀 가는 지명과 소멸해 버린 몇 군데 추억의 현장을 그저 묵묵히 추억하고 있는 것인지.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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