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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30. 경인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by 형과니 2023. 6. 21.

30. 경인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7-26 14:16:31

 

인천~서울 소요시간 획기적 단축 경제성장 촉진

30. 경인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의 전 구간 29.5가 완공, 개통된 것은 1969721일이다. 내일이 바로 721일이니까 꼭 42돌을 맞는다.

 

경인고속도로는 1967324일 기공(起工) 첫 삽을 뜬 후 19681221일에 서울에서부터 인천시 가좌동까지의 23.4구간에 대한 준공식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원(朱源) 건설부장관 등 정부 요인과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19681221일자 동아일보는 적고 있다.

 

그러니까 착공일로부터 꼭 3일이 모자란 19개월 만에 전 구간 29.579.3% 공정인 23.4를 완공한 것이다. 노폭 20.4m로 총공사비 338천만 원에 연인원 876천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가좌에서 인천터미널까지의 6.1구간 공사는 1969721일에 이르러 완공을 보면서 고도 성장시대의 계기가 되는 기반시설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인천시사에 기록된 대로 서울 양평동인천 용현동 구간의 총 연장 29.54차선 노선을 확정하여 착공했지만 ADB(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 소요자금 중 일부에 대해 차관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부대조건 관계로 시간이 지연되었고, 공사 수주업체의 능력과 경험 부족으로 공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에 건설부는 1968년 노선 경유지인 서울시·인천시·부천시에 용지 매수와 토목공사를 위임하여 공사를 재개하였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사는 19684월부터 시작되어 13개월 만인 1969721일 개통된 셈이었다. 공사업체도 전국 도급 순위 1·2·3위 업체인 현대건설·대림산업·삼부토건이 공동 출자하여 경인고속도로주식회사를 설립, 수행하게 되는 곡절을 겪었다.

 

경인고속도로 준공식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그 당시 당중국민학교 교정에서 있었는데 이날 전장 425의 경부고속고도로 첫 구간인 서울-수원 간 24.8에 대한 준공 기념식도 함께 거행되었다. 정부는 경인, 경부 두 개의 고속도로 공사를 동시에 시작했던 것이다.

 

구간 길이가 짧은 경인고속도로조차도 100% 완공이 안 되고, 경부고속도로는 전체에 5~6%밖에 안 되는 고작 한 구간 공사를 마치자 정부가 서둘러 준공식을 가진 것은 아마 당시 고속도로에 대한 탐탁지 않은 시선과,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상당수 사람들이 제기하고 있는 시기상조론이나, 무용론을 겨냥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잘은 몰라도 정부는 또 이런 신속한 토목 건설 능력과 역동성을 대외에 널리 과시함으로써 정부 이미지 업(Up) 효과와 더불어 차관 도입의 원활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날 주원 건설부장관은 식사(式辭)를 통해 이 두 고속도로는 격증하는 수송 수요에 대응하는 한편 대국토건설계획(大國土建設計劃)의 동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오늘 고속도로가 부분적이나마 개통됨으로써 그 경제적 효용이 산업 경제 문화 국방 등 각 분야에 큰 영향을 줄 것은 물론 도시와 농어촌 사이의 소득 격차를 좁히게 될 것이라며 고속도로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동아일보는 전한다.

 

그날 두 고속도로는 영등포에서의 준공식이 끝나고 이어 박 대통령이 경수(京水), 경인(京仁) 간의 시발점 및 종점에서 테이프를 끊음으로서 개통되었다고 하는데, 게재된 사진은 경인고속도로 인천 종점인 가좌동에서 박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 등이 테이프를 절단하는 장면이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은 종래 서울인천 간의 운행 소요 시간이 1시간이던 것을 18분 정도로 획기적으로 단축시킴으로써 서울과 인천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광역도시권이 형성되었다. 19745월 인천항 선거(船渠) 공사가 끝나면서는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반적으로 경인고속도로의 개통은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함과 동시에 인천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항만도시, 공업도시로서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으며, 경제성장의 주춧돌 역할과 교통 완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다.

 

이후 인천과 서울간의 교통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교통체증에 의한 물류비의 증가 등 산업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분석에 따라 기존 경인고속도로의 확장은 물론 제2경인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등이 속속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최초의 경인고속도로는 일부 구간은 이미 통행량이 도로의 용량을 넘어 고속도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여서 현재 통행료 폐지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최초 경인고속도로로 돌아가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보자.

 

어느 기록인가에 경인고속도로에는 “1969412일 고속버스 20대가 처음으로 운행되었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그보다 좀 앞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최초의 경인고속버스 회사는 인천을 연고로 성장한 한진고속이었다. 한진고속은 최고급 리무진 고속버스를 노선에 투입해서 요금은 비쌌어도 경인간 승객을 호사시켰다. 당시 이 노선 고속버스는 동인천 역전을 출발하여 배다리를 지나고 송림동을 거쳐 가좌동 인천 종점에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고속고도로 운행을 했었다.

 

초기 한진고속 버스에는 미모도 뛰어나고 세련된 매너의 스튜어디스가 승차했다. 스튜어디스는 버스 운전기사 옆자리에 좌정한 채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차내를 왕래하며 상냥한 미소와 함께 간단한 음료 시중을 드는 등 아주 안락하고 고급스런 서비스를 했다. 차장과 조수에게 떠밀려 승하차하던 콩나물시루 시내버스와는 완전 하늘과 땅 차이였다.

 

차체 역시도 미끈하고 거대한 데다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거의 흔들림이나 출렁거림이 없어 미끄러지듯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이 한진고속 리무진 버스는 서울역까지 운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보다는 앞선, 곧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의 이야기지만 19675월 정부는 경부·경인고속도로 주변에 토지를 대규모로 매수한 개인 또는 법인에 대해서 자금출처 및 자본 유동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아마 고속도로변 지가가 상승할 것으로 판단한 투기 세력들이 달려들어 도로가 계획된 주변 땅을 매집하면서 지가 상승을 과열시켰던 것 같다.

 

 

경인고속도로 상에서 참담한 비극의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우리 인천 시민 모두가 놀란 사건으로 기억되는데, 19701011일 당시 신민당 소속 인천 출신 김은하(金殷夏) 국회의원 일가가 윤화(輪禍)를 당한 사건이었다. 김 의원 일가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그만 김 의원 부인과 운전사가 사망하고 둘째딸 등 4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는 없거니와 40년 전 아픔을 새삼 들추어내는 것 같아 가족에게 죄송스런 마음이다.

 

또 고속도로 교통사고로는 1969816, 경인고속도로서 한진 고속버스가 삼륜차를 피하려다 초소를 들이받고 대파되어 승객 52명이 부상했다는 기록 자료가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그 당시는 삼륜차도 경인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19730718일 인부를 치어 숨지게 한 운전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서울지법 인천지원의 판결이 있었다는 거두절미의 기사가 있다.

 

이면에 이 같은 가슴 아픈 사연이 있기는 하지만 경인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화 도로로서 성장시대를 이끈 기반시설의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경인고속도로는 통행료 징수를 폐지하고 경제 성장의 주역인 인천과 인천 시민의 것으로 온전히 돌려주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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