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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역사산책

33. 용동마루턱과 내동 거리

by 형과니 2023. 6. 21.

33. 용동마루턱과 내동 거리

인천의문화/김윤식의 인천역사산책

2011-08-31 13:46:29

 

'계몽·선전용' 용동철탑 '패션 1번지' 내동상가

33. 용동마루턱과 내동 거리 

 

생각해 보면 참 낯익고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세사에 휘둘려 살다 보니 어느 결에 다 잊고 이렇게 옛 사진을 보면서나 '맞아. 이랬구나!'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간은 망각을 향해 간다고 했고, 또 그래서 어느 시인은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라고 했는지 모른다. 잊었던 옛날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오고 눈가가 흐려지는 것이다.

 

살던 곳,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던 낯익었던 곳을 머릿속에 환히 되살려 주는 것은 뭐라 해도 사진이 제일일 것이다. 옛 시가지가로, 저자거리, 골목길, 집과 건물, 상가 간판, 사람들 모습을 촬영한 풍경 사진은 보는 이의 마음을 단박에 그때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지난날 인천 시가지 곳곳의 풍경과 풍물을 앵글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사진작가 중의 한 분이 박근원(朴根遠) 씨이다. 특히 그의 사진이 주는 느낌이 아주 서정적이어서 들여다볼수록 옛 향수에 사무쳐 가슴이 '저려 온다.' 그의 인천 풍경 사진들은 사실만을 직시(直示)한 차갑고 무미(無味)한 기록물이 아니라, 차분하고 단순한 구도 속에 우리 내면의 정서를 일깨우는 한 편의 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용동마루턱의 철탑

 

이 용동마루턱의 철탑 사진도 그렇게 우리 감정을 과거로 이끈다. 옛 인천 토박이들이나 쓰던 용동마루턱이란 지명도 더욱 그렇게 부추긴다. 동인천역에서 답동, 신포동 방향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대로의 정상부를 지칭하는 이 지명이 그토록 다정하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일제 때부터 오른쪽의 내동, 인현동보다는 건너편 쪽 용동에 권번과 요릿집 등 유흥업소가 많이 생겨나 상대적으로 활기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용동마루테기라는 말을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흔히 들었던 터였다.

 

어쨌거나 반원 모양의 문양을 가진 둥근 철제 아치와 그 아치 상단부를 횡단하는 가로 철골 구조를 가진 선전탑이 이 사진의 중심이라고 볼 때, 그 반원 안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들과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이 정면 저쪽 한 개의 점으로 소실(消失)해 가는 구도가 평범한 시가지 풍경 사진 이상의 느낌을 준다. 더구나 정면 저쪽은 다시 경사가 져서 이 풍경이 점차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빨려드는 듯한 기분은…….

 

주제넘은 사진 품평은 그만하자. 이 용동마루턱 위에 언제 이런 철탑이 세워졌었는지, 그리고 언제 철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 볼 수가 없고, 또 관심을 둘 만한 중한 사건도 아니어서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짐작컨대 1960년대 끝 무렵이나 1970년대 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1967년에 동인천지하도 공사를 하면서 당시 역 광장에 서 있던 계몽 선전탑을 철거했기 때문에 그 대타로 이곳에 선전탑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그 무렵 답동 사거리 복판에 세워졌던 라이온스 시계탑도 철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진을 보면 촬영 시기가 1970년대 후반 이후, 혹은 198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왼쪽 차선에서 동인천역 쪽으로 달려 내려오는 택시 차종이 포니 자동차이기 때문이다. 포니자동차는 19762월에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은 인천시청이 아직 중구에 있던 때였다.

 

이 같은 아치탑의 용도는 아는 대로 큰 행사나 국가 시책, 시 행정 공표, 사회 계몽, 홍보를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국경일 등 국가 경축 행사 기념, 전국체전 개최, 납세 독려, 밀수 근절, 혹은 불조심 강조기간 같은 사안들의 홍보 격문, 표어를 날짜와 주체를 함께 넣어 써 붙이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용동마루턱 이 용동철탑은 행인의 통행이 빈번한 거리 언덕에 자리잡았던 까닭에 최적의 장소에 최적의 선전 철탑으로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효과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크게 발전했다는 판단에서인지 위정자들이 시내 곳곳에 서 있던 이런 종류의 선전탑들을 대부분 철거해 버렸다.

 

두 번째, 내동상가 풍경 사진은 더욱 각별하게 많은 감회를 준다. 1967년 대학 2학년 여름방학 직전 무렵, 생전 처음 고가(?)의 남방셔츠를 바로 사진 중앙의 맞춤 센타 미도사에서 맞추어 입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라베스크 문양처럼 식물 줄기 같은 것이 가득 프린트된 셔츠로 아래 옆구리 양옆은 단추로 늘이거나 줄이도록 되어 있는 옷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무슨 돈이 생겨 그 옷을 맞춤까지 해 입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학교에 입고 가서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했었던 것만은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1964년 내동풍경

 

오늘날은 신포동 문화의 거리니 패션거리니 하면서 이 거리를 너나 할 것 없이 신포동으로 통칭하는데 실제는 좌우가 다 내동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내동상가라고 불렀다. 일제 때부터도 한인 포목상이 많았던, 인천의 명동으로 최신 유행 의류 상가의 대명사였다. 물론 그 전통 그대로 지금도 구도심 최고의 의류 패션 거리로 번화(繁華)를 누리고 있다.

 

이 사진은 1964년 풍경으로 늘어선 건물 모양이나 지나는 행인의 모습이 이게 무슨 패션 1번지였나 싶게 초라하다. 틀림없이 요즘 사람들 머릿속에는 이런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비스듬히 기운 목재 전신주 풍경에서, 타일 같은 것으로 외벽을 치장한 단층의 상가 건물들과 비슷비슷한 크기의 함석판 위에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글자들을 쓴 간판들. 초라하고 누추한 듯해도 옛날 모습이 사뭇 반갑다. 개중에는 大信洋行같은 순 한자로 쓰인 간판도 보여서 더욱 낯익은 느낌이다.

 

사진 왼쪽이 경동사거리 방향이고 오른쪽이 중앙동 방향인데, 카메라 앵글 위치로 보아 지금의 기업은행 자리쯤에서 비스듬히 바라보고 찍은 것 같다. 꼭 두 집, 지붕 위로 흐릿하게나마 솟은 TV 안테나도 보인다. 이 무렵이라면 TV는 인천에서도 부유층 소리를 들어야나 소유할 정도였다. 이채로운 것은 상점마다 진열장 앞에 흰 차일을 친 모습인데 시간이 한낮의 일광이 강렬하게 들이비치는 때인 모양이다. 사진 속에 드리운 그림자의 방향이나 길이로 보아 늦여름 날 오후 네 시쯤일 것이다. 조금 비스듬하게 서 있는 목재 전신주의 모습은 차마 애처롭다고 해야 할 것인지…….

 

그 앞을 지나는 젊은 남성과 남루한 복색의 노인과 또 그 앞의 여학생은 오늘날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남성과 노인은 긴팔 옷을 입었으나 여학생과 사진 우중앙의 양산을 받친, 유행인 듯 비슷한 패션을 한 두 모던 걸은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이 인천 모던 걸들의 최신 패션도 오늘날 이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그 자체이다.

 

그 중에도 중앙의 흰 바지저고리에 지게를 진 남자의 모습은 좀 과장해서 조선 풍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짊어진 것은 다라, 냄비 같은 양은 제품이다. 6?25를 지내고 1960년대에 들면서는 오지그릇 대신에 양은솥, 양은냄비, 양은그릇 따위가 개량 살림살이로 부엌을 점령했었다. 그래서였는지 1964년은 이렇게 인천 최고 번화가 내동상가에도 양은 주방기구 등짐장수가 지게를 지고 다녔다.

 

사진 속에는 또 한 가지 별난 구석이 보인다. 물론 도로가 오늘날과 같이 인도, 차도의 구별이 없다는 점도 그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왼쪽 끝에 보이는 차량의 통행 방향이다. 이 시절, 이 도로는 양방통행이었다. 그때는 인천 전체를 통틀어 차량이 불과 몇 대 되지 않아 웬만한 도로는 인도 표시도, 횡단보도 표시도, 또 일방통행 같은 차량 통행 제한도 없었다. 그것이 오늘날은 270만 인구, 3명당 1대의 차량이 운행하고 있을 정도로 복잡해지다 보니 제한을 가해 사진 속 자동차의 반대 방향으로만 다니게 한 것이다.

 

옛날 사진을 보면 우리의 생활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나 싶을 만큼 큰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특히 토박이들은 제 시가지 옛 사진을 보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상에 빠진다. 시골 장터거리처럼도 보이지만 이 거리에 있었던 천일양품점, 짐다방, 삼공탁구장, 백마양화점, 문화양화점들도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저려 올정도로 그립다. 거기서 보았던, 낯익고 마음 익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모습 때문일 것이다.

 

 

김윤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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