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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88

소 서 노 소 서 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5 11:53:15 소 서 노 인천사 연구의 1세대 개척자는 고 박광성 교수였다. 선생이 주축이 된 인천교육대 산하 기전문화연구소(畿甸文化硏究所)는 미개척 분야였던 인천사에 비로소 학문적인 시각을 투사하기 시작했다는 영예를 누려 손색이 없다. 물론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 역정,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 이훈익 선생의 인천지명고, 김양수 선생의 인천개항백경 등이 지역사 연구의 기름진 토양이 되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다. 인천사 연구는 그렇듯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오늘에 이르러 경제사, 건축사, 항만사, 행정사 등 각종 분야사(分野史)에까지 연구의 손길이 닿게 된 것은 특기할 만.. 2023. 5. 10.
‘중앙’에 밀린 방송 사각지대 ‘중앙’에 밀린 방송 사각지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1 10:00:49 인천역사 책갈피 ‘중앙’에 밀린 방송 사각지대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세계 최초의 방송은 1920년 11월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社)의 ‘KDKA 국(피츠버그 소재)’이 제29대 미 대통령 선거날, ‘하딩’의 선거 결과를 보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뒤, ‘JODK’ 경성방송국이 세계에서 6번째로 개국했다. 출력은 1kw, 주파수는 870㎑였는데, 불행히도 이 방송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J ODK’란 호출부호와 ‘방송(放送)’이라는 명칭도 우리 것이 아니었다. 토쿄방송이‘JOAK’였고, 경성방송국은 그 네 번째 돌림자인 ‘JODK’였다. ‘방송’이란 용어도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 기선 삼도환(三島丸.. 2023. 5. 10.
향교’도 최초, 초등 신교육도 최초 향교’도 최초, 초등 신교육도 최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11 09:59:10 인천역사 책갈피 ‘향교’도 최초, 초등 신교육도 최초 새 학기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입학식을 한 어린이, 꿈 많은 중학생, 대입 전선에 나선 고3,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을 대학생, 모두 등교길 발걸음이 싱그럽기만 하다. 바야흐로 인천의 수백여 학교들은 기지개를 펴고, 학생들은 힘차고 보람있는 내일을 꿈꾸고 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쾌적한 교육 환경과 최첨단의 시설 등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대변혁을 느끼게 한다. 그럴수록 그 옛날 인천의 학교는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학교의 원조는 향교와 서당 멀리 고려 시대 인천의 학교에는 관학인 향교.. 2023. 5. 10.
종鐘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종鐘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7-09 13:55:04 시각을 알리던 옛 소리들 종鐘과 오포午砲 그리고 사이렌 글·조우성 시인·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들으며 무자년 새해를 맞았다. 종을 쳐서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렸던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시대에는 그를 ‘인정(人定)’이라 했다고 한다. 서울의 보신각 종을 비롯해 전국 각처의 요충지와 큰절에서는 2경(二更)인 10시를 기해 종을 28번 쳐 통행 금지를 알렸다. 반면에 5경(五更)인 새벽 4시경에 33번 치는 종은 파루(罷漏)라 했다. 인정이 울리고 나면, 순라군은 화재, 도둑 등을 예방하기 위해 성 안을 돌았고, 통금 위반자를 잡아들였다. 초경과 5경 위반자는 곤장 10대, 2.. 2023. 5. 10.
인천잡시에 나타난 한적과 우울 인천잡시에 나타난 한적과 우울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7-08 19:21:19 인천개항장 풍경(3) - 인천잡시에 나타난 한적과 우울- 이영태 인하대 BK21 연구교수 1892년 4월부터 1893년 3월까지 1년 정도 인천전환국에 파견돼 있던 일본인 요코세 후미오(橫瀨文彦)의 눈을 통해 당시의 인천모습을 살필 수 있다. 물론 그의 시선이 인천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 개항기 인천항 는 점은 앞선 인천역사산책에 기술한 바와 같다. 자국(일본)에 대한 자긍심과 그 뒤켠에 자리잡고 있는 영국과 청국에 대한 경계, 그리고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선에 대한 시선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오고, 개흙 모래에 거대한 배가 몇 척 정박해 있구나. 뱃사공.. 2023. 5. 9.
월미도 역사유적지 월미도 역사유적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27 10:22:33 월미도는 면적 0.7㎦의 작은 섬으로 해발 105m의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란 이름이 붙여졌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월미도는 백제 이후 해상교역이 활발하던 고려에 이르기까지 자연도(영종도)와 함께 중요한 교통로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양수도를 지키는 군사기지 였으며 월미행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개항기에는 강화도를 거쳐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관계로 외국의 선박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해 머무는 첫 기착지로써 강화도, 영종도와 함께 수난이 많았던 섬이었다. 월미도가 인천과 육지로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1918년 북성지구에서 월미도에 이르.. 2023.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