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역사89 월미도 역사유적지 월미도 역사유적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8-06-27 10:22:33 월미도는 면적 0.7㎦의 작은 섬으로 해발 105m의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란 이름이 붙여졌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월미도는 백제 이후 해상교역이 활발하던 고려에 이르기까지 자연도(영종도)와 함께 중요한 교통로였고 조선 시대에는 한양수도를 지키는 군사기지 였으며 월미행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개항기에는 강화도를 거쳐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관계로 외국의 선박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해 머무는 첫 기착지로써 강화도, 영종도와 함께 수난이 많았던 섬이었다. 월미도가 인천과 육지로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1918년 북성지구에서 월미도에 이르.. 2023. 5. 9. 인천개항장 풍경(1) 인천개항장 풍경(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6-23 15:55:11 인천개항장 풍경(1) - 일본인의 한시(漢詩)에 나타난 개항장- ▲ 이영태 인하대 BK21 연구교수 1883년 인천이 개항되자 인천 개항장은 일본, 중국인은 물론 각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이른바 각 나라의 거류지가 조성돼 상당히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었다. 당시의 모습은 각국인들이 묘사한 기록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중 특히, 『신찬인천사정(新撰仁川事情』(1898)과 『인천부사(仁川府史)』(1933)에는 전거를 밝히지 않은 한시(漢詩)가 등장한다. 이것은 마치 해당 집필자가 한시로 소회(所懷)를 읊은 것인 양 착각할 정도로 일문(日文)과 뭉뚱그려 섞여 있기에 일어 번역자에게 난감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것.. 2023. 5. 8. 사진엽서로 보는 인천 근대 -인천 개항장 풍경(7) 사진엽서로 보는 인천 근대 -인천 개항장 풍경(7)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8-12 00:45:08 인천 개항장 풍경(7) - 사진엽서로 보는 인천 근대 -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사진엽서와 오리엔탈리즘 사진은 19C에 도입되는데, 당시 화가의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 해군의 종군사진사가 보고용으로 한국사람들을 찍어간 것에서 알려지게 됐으며, 그 뒤 개항이 되고 일본 등과 왕래가 많아지면서 사진술이 들어오고 1884년에는 사진관도 생기게 됐다. ▲ 인천항엽서 사진엽서 역시 회엽서(繪葉書)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진관.. 2023. 5. 8. '경성잡필' 1936년 12월호에 수록된 "송도유원을 말한다" 라는 글 '경성잡필' 1936년 12월호에 수록된 "송도유원을 말한다" 라는 글 知識 ,知慧 ,生活/옛날공책 2006-12-26 01:19:19 [자료보충] '경성잡필' 1936년 12월호에 수록된 "송도유원을 말한다" 라는 글 ▲ 1936년 12월호에 송도유원의 상무인 후지모토 겐이치(藤本源市)가 기고한 "송도유원을 말한다"는 글이다. ▲ 1938년 9월호에 수록된 "인천 송도를 보다"라는 글인데, 필자는 그냥 '일기자(一記者)'라고만 표시되어 있다. ▲ 역시 1938년 9월호에 수록된 "인천 송도를 보다"라는 글의 뒷부분이다. 위의 글 가운데 단순히 사료가치로만 본다면, 앞에 나온 후지모토 겐이치의 글이 아무래도 더 낫다고 할 것이다. 우선 글이 쓰여진 시점이 '옥련리'가 막 인천으로 편입되어 '송도정'으로 .. 2023. 5. 8.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仁川愛/인배회 2008-06-03 11:54:48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과 학생운동 견수찬 인하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 ▲ 내리교회 학생들의 군사훈련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주춤해지자 인천에서는 민족운동의 열기가 고양되고 각종 조직이 설립돼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인천의 청년운동도 전국적인 민족운동의 열기에 발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는데, 3·1운동 이후 1924년 4월까지는 주로 민족의식의 고취와 친목도모, 사회봉사 등을 위주로 하는 민족주의 혹은 계몽주의 청년운동이 전개됐다. 이후 1924년부터 1927년까지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조류로 사회주의가 등장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청년운동이 활발했고, 1927년 이후에는 민족운동의.. 2023. 5. 1. 인천의 3·1운동과 만국공원 회합 인천의 3·1운동과 만국공원 회합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51:20 인천의 3·1운동과 만국공원 회합 견수찬 인하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인천의 3·1운동 ▲ 독립선언서 일제의 국권침탈 이후 숨죽였던 민족운동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폭발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기점으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돼 갔고, 해외동포들도 각지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인천에서도 이러한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인천, 부평, 강화, 용유, 덕적 등에서 수많은 군중이 독립만세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인천의 3·1운동은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의 동맹휴업에서 비롯됐다.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6일부터 9일까지 4일간 동맹휴.. 2023. 4. 29. 이전 1 2 3 4 5 6 7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