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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역사89

인천 축항(築港) 인천 축항(築港)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50:07 인천 축항(築港)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개항 초기 인천항과 잔교 설치 ▲ 갑문기초공사(1914) 인천항은 조선 초기 제물량에 수군 만호영이 설치돼 서해의 방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수도 서울에 인접한 입지적 조건에서도 군항이나 상업항으로서의 임무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 7년(1656) 제물량이 강화도로 옮겨감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 놓이면서 항구로서의 개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개항 당시 제물포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다. 서해안이 원래부터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데다가 인천은 그 차이가 10m나 되었기 때문에 배가 접.. 2023. 4. 29.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변화(2)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변화(2)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9:05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변화(2)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910년 8월 22일 무력으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는 대한제국(한국)의 국호를 조선이라 바꾸고 종전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통감부 대신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식민지 침략의 다음 단계로서 인천부의 전설과 유래가 담긴 동명(洞名)을 말살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부식시키기 위해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했다. 이미 통감부 시기부터 인천의 일본거류민단이 설치된 지역에는 한국식 동리명과 함께 일본식 동리명이 수없이 붙여지고 있었다. 일본부내의 일본식 지명은 대개 그들이 떠나.. 2023. 4. 29.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확대(1)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확대(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7:53 인천부의 변천과 부역(府域)의 확대(1) 강덕우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그 중심무대와 역할면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취락으로 변화하게 됐다. ▲ 대동여지도 속의 인천 개항장의 확대와 개항장을 통한 국내외 무역의 활성화, 그리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거주는 이 시기 중심도시의 위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내륙적 성격의 관교동으로부터 해양적 성격의 제물포로 중심무대가 변천하고, 지방행정 기능의 역할로부터 세계교역 기능의 수행으로 변모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적 여건보다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따른 세계체제로의 편입이었다는 점에서 인천의 도시발달은 태생적 한계점을 지니게.. 2023. 4. 29.
개항 후 외국상인과의 상권경쟁 개항 후 외국상인과의 상권경쟁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6:43 개항 후 외국상인과의 상권경쟁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외국상인의 진출과 인천객주회 개항 후 인천항의 무역은 초기에는 일본이 무역을 독점했으나, 이내 청·일간에 무역경쟁이 시작됐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무역독점이 강화됐다. 또한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독일의 세창양행(世昌洋行) 등 구미상인들도 인천에 상사를 두고 무역업을 하면서 청국 및 일본상인과 이권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일본상인은 상업회의소와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등을 조직해 인천항의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청국상인은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해 인천항 상권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구미상사는 선진적 경영기법과 .. 2023. 4. 29.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8 20:45:43 인천과 청일·러일전쟁 강옥엽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현재 인천은 ‘동북아의 중심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은 이미 지난날 동북아의 중심도시로서 ▲ 바리야크와코레츠호 침몰삽화 새로운 문물교류의 현장이 됐으니, 근대 개항을 통해 한·중·일 및 서구열강의 각축 속에 국제도시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이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은둔(隱遁)의 나라’로 알려졌던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인천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인천은 제물포 개항(1883)을 전후로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서 그야말로 최전방에 위치한 선구지(先驅地)로서 그 역사적 시련을 감당해 왔다. 병인양요(1866), 신.. 2023. 4. 29.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5 11:30:08 인천의 근대시설(9)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이영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BK21 연구교수 월미도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때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관광지로서, 또 근대 100여 년 한국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뚝 솟은 이 섬은 말 그대로 인천의 상징이다. 월미도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닷물을 데워 목욕물로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조탕을 개발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월미도 해수풀장 # 일본기록에 나오는 월미도 풍경 특히,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월미도는 다른 공간과 변별되는 각별한 곳이었다. 월미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그들의 인천..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