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역사89 인천의 외국영사관 인천의 외국영사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3 12:56:50 국제도시로의 변화(3) - 인천의 외국영사관 - 손장원 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인천시 문화재위원 영사관은 영사가 외교관계를 수립한 다른 나라에 주재하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주요 업무는 주재국과의 친선관계유지, 자국민의 보호, 비자와 증명서 발행, 정보수집 등이다. 현재 인천에는 외국 영사관이 전혀 없지만, 개항기에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진출하려는 여러 나라는 인천에 속속 자국의 영사관을 세웠다. 영사관은 단순히 인천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보호를 위한 건축물 외에도 경찰서, 우체국, 전보소, 형무소 등을 설치해 우리나라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했다. 인천에 영사관을 세운 국가는 일본, 중국, 영국.. 2023. 4. 27. 인천의 외국인묘지 인천의 외국인묘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3 12:55:53 국제도시로의 변화(2) - 인천의 외국인묘지 - 문상범(인천고등학교 교사) ▲ 외국인묘지-전경 현재 인천의 외국인묘지는 120여 년 전 이역만리 먼 길을 찾아왔던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인 천 개항장에 와 있던 외국인을 매장했던 사실상 국내 최초의 외국인묘지다. 인천이 지닌 오랜 역사·문화적 전통을 기반으로 국제도시임을 부각시키려는 입장에서는 되새겨봐야 할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1883년 개항 후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 군사, 외교, 경제, 교통 등 각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이에 조선에서의 이권을 노린 일본, 청국, 러시아와 구미 열강들이 앞다투어 인천에 상륙했.. 2023. 4. 27. 국제도시로의 변화(1) 국제도시로의 변화(1)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8:01 국제도시로의 변화(1)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많은 외국인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개항을 주도한 일본인을 비롯해 청국인, 서 ▲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구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대부분 조선과의 교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개항 초기 인천항에는 대규모의 대외교역을 감당할 시설과 제도가 완비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각국과 교역하고 조선의 관문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항만과 교역을 뒷받침할 시설과 관세 제도의 확충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항만시설을 확장하고 감리서와 해관을 설치·운영함으로써 인천항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관.. 2023. 4. 27. 인천 조계의 형성과 변천 인천 조계의 형성과 변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7:08 인천 조계의 형성과 변천 강덕우(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조계지 번화가 모습 # 조계제도의 기원 조계(租界)는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으로 지방 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곳인데 이와 같은 제도는 1842년 중국 남경조약에 기원하고 있다. 중국의 광둥·상하이 등 5개항을 개항한 후 외국인 거주가 실제로 시작되자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비위생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반면, 중국인들은 오랜 중화사상으로 서양인을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인들과의 혼거(混居)를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개항장 안에서의 .. 2023. 4. 26. 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 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6:02 개항 전후 인천의 연안방비책 배성수(인천광역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 개항 전후 인천 연안의 방비 목적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선의 개항이 결정된 이후 제물포가 개항후보지로 부각되면서 조정에서는 인천 연안의 방비가 논의되었다. 이는 개항 후보지의 지형측량을 위한 일본선박의 무단 상륙에 대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인천의 개항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인천 연안에 방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로 첫째, 이 지역이 강화에 못지 않은 보장중지라는 점, 둘째, 손돌목 등의 험로가 위치하는 강화수로를 경유하는 것보다 이 지역을 통해 도성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고 거리상으로도 가깝다는 점, 셋째, 일본 측이 이미 인천.. 2023. 4. 26. 인천에서의 조약 인천에서의 조약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0 21:05:08 인천에서의 조약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초지진 #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의 체결과 개항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일본은 제국주의 제제를 확립하고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침략에 앞서 1874년 5월 대만침략을 단행했는데, 이후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자문을 조선정부에 보냈다. 또한, 조선정부 내에서도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열강과의 수교에 우호적인 의견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견수찬(인하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2023. 4. 26. 이전 1 ··· 5 6 7 8 9 10 11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