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모습297 69년 2월의 하인천 주변풍경 69년 2월의 하인천 주변풍경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6-09 23:47:54 Neil Mishalov의 Korean Photo Collection 중 69년 2월의 인천 오림포스호텔에서 내려다 보고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입니다. 중심부 붉은벽돌건물(흰글씨로 대한통운이라 씌어진 건물) 공터 맞은편부분에 한중문화관이 지어졌으며, 뒤쪽 일대가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왼쪽 제일 위쪽에 답동성당의 종탑이 보이고, 바로 밑은 검은 지붕이 58은행 (현재 인천음식업조합 )입니다.왼쪽 끄트머리2, 3층건물의 진원로프상사는 지금까지도 꿋꿋하니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제일 아래 노란건물은 "대한통운" 건물인데 번듯하니 새로 지었습니다. 바로 위 붉은 건물 수도사업소와 그 위 검은건물은 .. 2023. 6. 13. 해양방위의 보루, 인천 해양방위의 보루, 인천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5-31 15:27:32 해양방위의 보루, 인천 평온한 인천 바다에 해일이 일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지형상 북부와 남부의 중간에 위치하고 육지와 해양을 연결하는 지역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삼국시대 중국과의 최초 해양교류가 인천 능허대에서 시작되었고, 중국 사신의 영접처이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문화교류에 실제적 영향을 끼친 개항이 제물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이 바다에까지 미쳤고, 18세기 이래 이양선이 빈번히 출현하는 지역으로 동서양 외부 세력과의 충돌 현장이기도 했다. 평화 시에는 국제교류의 통로로서, 전시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무력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글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의 지정.. 2023. 6. 13.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제물포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제물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19 12:55:01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제물포 한적한 포구가 개항의 중심지로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곧잘 쓰이는 제물포(濟物浦)는 지금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였다. ‘제물’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에서 비롯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물량만호’는 인천군 서쪽 성창포에 있다. 병선 4척과 무군선 4척으로 각 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510명이라고 기록돼있다. 제물에 대해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제수’, 곧 ‘물을 다수린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 2023. 6. 12. 기와집 모여 있던 인천 최고의 부자마을-율목동 기와집 모여 있던 인천 최고의 부자마을-율목동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19 12:53:35 기와집 모여 있던 인천 최고의 부자마을 화장터자리 1960년대 공원으로 탈바꿈한 율목동 율목동(栗木洞)은 1910년대부터 인천의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또는 밤나무굴이라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 그대로 옮겨져 율목리, 율목정 등으로 불리다 광복 후에 그대로 율목동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동네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는 ‘밤골’이라는 땅이름이 적지 않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율곡’으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성리학자 율곡 이이선생도 고향 땅이름을 호로 쓴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밤골은 ‘반골’에서 이름이 바뀐.. 2023. 6. 12. 북성동 어시장 북성동 어시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19 12:50:22 옛 인천의 향수, 북성동 어시장 1975년 연안부두 이전 전성기 연간 1천억 매출 월미도가 있는 북성동(北城洞)은 조선 초-중기 이곳에 있던 성곽 ‘북성’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북성동에는 월미도를 비롯해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인천 최초의 현대식 호텔(파라다이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인천 부두와 어시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 지난 2000년 11월 1일 중구청과 자매결연을 한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시가 기증해 북성동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운 패루(중국의 전통 대문) 〉 인천에 상설 형태의 어시장이 들어선 시기 역시 인천 개항 이후다. 개항 후 1880년대 말 무렵부터 인천거주 일본인들이 늘면서 수산물 시장이 .. 2023. 6. 12. 골목대장이 뛰어놀던 모모산 언덕(도원동)| 골목대장이 뛰어놀던 모모산 언덕(도원동)|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19 12:47:22 골목대장이 뛰어놀던 모모산 언덕(도원동) 인천 최초의 학당에 이어 야구의 메카로 자리 잡아 도원동(桃源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와 독각리에 들어있던 곳이다. 장천리와 독각리는 지금의 남구 숭의동 지역이 중심이었는데, 1906년 이 두곳에서 일부를 떼어 붙여 도산리라는 동네가 새로 생겼고, 이것이 광복 뒤에 도원동이 됐다. 도산이나 도원은 모두 이곳에 복숭아밭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오지만, 사실 일제가 도산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복숭아 밭 때문이 아니었다. 도산리는 일본인들이 기리는 ‘도산시대’, 곧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말.. 2023. 6. 12. 이전 1 ··· 26 27 28 29 30 31 32 ··· 5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