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옛모습297

인천의 말 목장 이야기 인천의 말 목장 이야기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34:11 인천의 말 목장 이야기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라는 옛말이 있지만, 인천에도 말 목장이 있었다. 지금도 강화군과 옹진군의 섬 지역에는 조선시대 군사용 말을 방목했던 마성(馬城)과 마장(馬場)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좋은 품종의 말 생산지로 유명하여 강화 매도목장의 ‘사자황’이라던가 진강목장의 ‘벌대총’은 왕이 탔던 우수한 명마로 알려져 있다. 글 강옥엽 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은 해안과 도서지역으로 되어 있어 말을 사육하기에 여건이 매우 좋았다. 조선시대에 말목장(소목장 포함)은 대부분 섬이나 해안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서울과 가까워 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편리하고 또한 말을 사육하기 위해 필요한 좋은 .. 2023. 6. 11.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4-03 22:31:09 문학산 비류, 인천 2000년의 역사 세계의 역사에서 고대국가의 탄생은 철기문화의 도입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의 탄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류(沸流)백제 건국의 무대가 바로 미추홀(인천)이었고, 그 터전이 문학산(文鶴山)이었다. 한국사 연표에서 보면 백제가 국가를 세운 것은 기원전 18년이다. 인천 개항(1883) 100년을 기념하던 시점에, 지역의 역사학계는 비류가 미추홀인 인천에 도읍을 세운지 어언 정도(定都) 2000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다. 서울이 정도(定都) 600년을 내세웠을 때에도, 밀레니엄 역사에 대한 기념은 .. 2023. 6. 11.
바다로 늘어진 마을, 답동 바다로 늘어진 마을, 답동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3-27 11:39:05 바다로 늘어진 마을, 답동 답동성당과 박문초등으로 명성 날려 답동(沓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던 땅이다. ‘논골’이라 불리던 동네로, 1903년 8월 인천부에 부내면이 생길 때 한자로 이름을 바뀌어 답동이 됐다. 논 답(沓)를 쓴 것은 ‘논골’의 논을 농사를 짓는 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천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이곳은 대부분 논 이었다고 하며, 바닷가 쪽으로는 지금처럼 매립되기 전까지 염전이 있어서 염벗말, 곧 소금밭이라는 불리던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닷물이 들어오는 마을에 방죽도 없이 논이 많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이 때문에 국어학자들은 ‘바다 쪽으로 늘어.. 2023. 6. 11.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16 중구청>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3-27 11:35:58 아픈 과거 딛고 인천행정의 중심지로 부상 1985년 중구 관동 떠나 구월동으로 이전, 인천시 행정 구월동시대 열려 인천시민들 중에도 관동 1가 9번지에 위치한 현 중구청이 옛 인천시청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인천시청이 행정에 있어 구월동시대가 열린 것은 1985년 관동을 떠나 인천시청이 구월동 신청사로 이전하면서부터다. 인천시청의 역사는 인천 도시성장사와 궤도를 같이 해왔다.중구 관동시대에서 남동구 구월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도시 규모가 확대될 때마다 인천시청의 심장부인 시청도 그 모습을 달리했다.인천 토박이나 인천에서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한 공무원들은 시청이 중구 관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관동시대를 기억한다.일제시대의 건축양.. 2023. 6. 11.
<인천의 옛 향수를 찾아서 15> 신흥동 신흥동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3-27 11:33:44 국내최초 ‘사이다’, '소세지‘ 공장 있던 곳 개항 초 화장터와 공동묘지로 유명 신흥동 신흥동(新興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개항 초기까지 시의 외곽 지역이어서 사람은 거의 살지 않고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특히 청일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들의 공동묘지가 이곳에 있었다. 그 뒤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화장터와 공동묘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1903년 들어 동네 이름이 화개동(化開洞)으로 바뀌었다. 이중 바닷가 쪽은 1910년대에 매립이 될 때까지 옅은 백사장에 물이 들어오는 곳이 많아 모래 말이라 불리기도 했다.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라는 땅이름은 이.. 2023. 6. 11.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14>용동 큰 우물 용동 큰 우물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10-03-27 11:29:03 풍류와 애환 함께했던 인천 최대 ‘권번’ 1970년대 튀김골목과 목로주점으로 변신 용동 큰 우물 용동(龍洞)은 지금도 흔히 ‘큰 우물’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개항 이후 생긴 이 마을은 경동 사거리와 동인천사이의 우측 방향의 용처럼 생긴 고개 주변에 있다고 해서 용리, 용운정 등으로 불려오다 1946년 용동이 됐다. 현재 동인천 길병원 뒷 골목에 있는 용동 큰 우물은 1881년에 만든 것으로 자연 우물을 현대식 우물로 바꾼 것이다. 이 우물은 맛이 좋고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이 않아 수돗물이 보급되기 전까지 많은 시민들이 길어다 식수로 썼던 곳이다. 인천 최고의 기생들이 연주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사진 또 이 물로 술을 빚어야 .. 2023.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