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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의영화이야기

무성영화의 추억

by 형과니 2023. 6. 29.

무성영화의 추억

 

퍼온곳 : 박물관풍경(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16 AUTUMN Vol.31)

글쓴이 : 이 원 규/소설가. 전 동국대 교수

 

 

무성영화의 추억

 

 

70년 인생을 인천에서만 살았다. 기억의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영화관은 고향 서곶의 간이극장이다. 검바위 마을(서구 검암동) 신작로 옆에 있던 교실 두 개쯤 되는 건물로 가운데 레일이 달린 칸막이 문짝이 있어 떼어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청년들의 회의장으로 쓰거나 여성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쳤던 것 같다.

 

주말 저녁 칸막이를 열고 돈을 받고 영화를 돌렸다. 초등학교 들어가던 해(1955) 여름밤에 누나들 손에 이끌려 거기 가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등 영화 몇 편을 보았다.

 

, 슬프도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변사의 비장한 대사에 곳곳에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 왼쪽 오른쪽 누나들은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당시 서곶에서 인천 다운타운까지 버스로 1시간 반이 걸렸다. 오랫동안 서곶출장소에서 일하던 아버님이 남부출장소(숭의동 장안극장 근처에 있었다)로 전근하셨다.

 

일요일 당직을 하는 날이면 두 살 위의 형과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중학교부터 시내에서 공부할 것이니 애들에게 주눅 들지 않으려면 도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자장면을 얻어먹고 아버지 직장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장안극장에 갔다. OK 목장의 결투였다. 검바위 마을 간이극장에서 가마니 떼기에 앉아 흑백 무성영화를 본 내게 총천연색 토키영화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장안극장은 비록 리모델링은 했지만 건물이 거의 그대로 살아남아 어쩌다 그 앞을 차를 몰고 달리면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형과 함께 도원동에 있었던 용사회관에도 갔다. 붉은 색 페인트로 쓴 세로 간판을 단 목조건물, 입장료가 장안극장의 1/3 값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는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를 보았다.

 

정의의 수호자 우리의 아란랏드! 어찌 불의를 보고 참는단 말이냐! 악당아, 내 총탄을 받아라! 탕 탕 탕.”

 

우리 형제는 권총 뽑아 사격하는 폼에 변사의 해설을 흉내 내면서 도원동, 유동 거리를 걸었다.

 

 

1960년 중학교 입학으로 시내로 나온 나는 송림동의 고모 댁에 기숙했다. 고모가 한없이 착한 터라 신나게 놀러 다녔다. 강화에서 유학 온 친구 하숙방에 교복을 벗어던지고 러닝셔츠 바람에 가난한 집 껌팔이 소년 차림을 하고 나섰다. 단속에 걸리니까 불량소년처럼 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인천은 갑자기 극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내가 다닌 율목동의 상인천중학교(인천고등학교 병설학교였다)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애관극장, 동방극장, 문화극장, 미림극장, 장안극장, 세계극장, 키네마,현대극장, 인천극장, 시민관 등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도시가 그랬을까. 1960년대 초반은 인천의 문화 향수가 전국 최고였던 것 같다.

 

상이군인들이 운영했던 용사회관은 우리학교에서 지척이었는데 이 무렵에 사라졌다. 엉성한 목조건물에 내부 가장자리에 나무의자들이 있었던, 그리고 가마니를 깔아 놓았던 극장, 빗겨가는 빗줄기처럼 화면에 빗줄이 가고 걸핏하면 필름이 끊어져 중단되던 곳, 몰래 소변을 본 탓으로 지린내도 났던 곳, 무성영화 상영관이어서 인지 가장 그리운 추억 중의 하나이다. 몇 해 전 친구들과 차를 타고 도원동 거리를 지나다가 용사회관 뒤에 살았던 고등학교 동창 이이현 형에게 물어보았다.

 

그 자리에 송무관이라는 당수도장이 들어섰지. 유용규라는 사람이 사범으로 와서 닫혔던 문을 열고 당수를 가르쳤어.”

 

이 형에게 들은 대답이다.

 

중학교 2학년은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에 참 좋았던 시절, 나는 공부는 제쳐놓고 야구를 하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어느 날은 P와 애관극장으로 갔다.

 

극장건물 아래쪽 자전거포가 있던 좌측면에 작은 골목이 있고 극장의 수직 벽에 마치 군사 요새의 총안(銃眼)처럼 창문들이 몇 개 뚫려 있었다. 여름이라선지 창문은 열려 있었다. P는 자기 친구네 집인 자전거포에서 의자 하나를 빌려와서는 담장 밑에 놓았다.

 

저건 변소 환기창이다. 네가 처음이니 먼저 올라가라. 창문으로 머리만 들이밀어라. 내가 엉덩이를 밀어 올릴 테니까.”

 

얼떨결에 그렇게 했는데 내부로 거꾸로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니 소변 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 내려섰다. 100년의 전통을 가져 인천의 명소가 된 애관극장, 변소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 간 건 상습범 P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밝힐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놀면서도 공부를 잘했고 뒷날 관료가 되어 고향 인천시의 고위관리로 일하고 은퇴했다.

 

 

예술적 감성을 키워준 애관과 키네마

 

애관은 더 큰 추억이 있다. 그해에 흑인 올훼(원제 Negro Orphue)를 단체 관람으로 간 것. 그리스 신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현대적 재변용으로 제작한 음악영화로서 세계 영화사상 손꼽히는 명화이다. 이 영화는 서울의 대한극장으로 가서 70mm 대화면으로 본 벤허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집 간 둘째 누나는 나를 음악과 문학으로 이끌어준 분이었다. 그 무렵에 친정에 왔고 나는 누나와 함께 다시 애관으로 가서 흑인 올훼를 또 보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연속해서 두 번을 내리 보았으니 세 번을 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글룩이 오페라로 작곡해 성공하고, 100년이 지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맨 먼저 보고 신화를 읽었고 그 다음에 오페라를 들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영화의 카니발의 아침OST와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부른 크로스오버를 좋아한다.

 

신화에 나오는 해원(解寃) 모티브가 좋아서 오페라도 즐겨 듣고 특히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아리아 에우리디체를 돌려주오를 좋아한다. 이 아리아는 오르페오 역이 부르는 곡, 원래 남성 거세 소프라노인 카스트라토가 불러야 하나 칼라스의 곡이 명음반이다.

 

고등학교로 올라갈 무렵 테너 탈리아비니가 출연해 독일어로 나를 잊지 마세요를 부르는 물망초(독일과 이태리의 합작영화였다)를 애관에서, 라 스카라 오페라 극장 공연을 필름에 담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키네마에서 여자 친구와함께 보았다. 캄캄한 데서 자리를 찾아갈 때는 손을 잡았으나 막상 나란히 앉아 관람할 때는 손을 잡지 못했다.

 

인천고 1학년 때 교지 미추홀에 음악에 관한 글을 쓰라는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다. 나는 오페라 해설을 쓰겠다고 대답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쓰고 싶었으나 여자 친구가 말했다. 나하고 같이 본 걸 써야 오래 추억에 남잖아.”하고.

 

인천에 극장들이 많아서인지 애관 동방 문화 키네마 미림은 개봉관이 되고 나머지 몇 개 극장은 재개봉관, 또 다른 몇 개는 동시상영관으로 격이 달라졌다. 동시상영관은 시간을 죽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죽치고 있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필름 한 세트를 갖고 두 개 극장이 돌리는 일도 많았다. 영화 1편의 릴리스는 대략 4, 두 극장이 시간차를 계산해 시작하고, A극장이 2개를 돌려 3번으로 넘어갈 때 B극장 직원이 1, 2번 릴리스를 받아 자전거에 싣고 냅다 달리는 것이었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세월이 흐르며 그 많던 극장들은 문을 닫고 애관 하나만 남았다. 대신 이곳저곳 복합상영관이 들어섰다. 대학 국문과를 가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둘째 누나, 내게 감성을 일깨워주며 소설가가 되기를 바랐던 누나는 세상을 떠났고 애관은 그 자리에 지금도 있다.

 

오페라 아이다를 교지에 쓰게 했던 여자 친구는 어디 사는지 모르고 키네마 극장은 주차장이 되어 있다. 어쩌다 모교에 가면 백주년기념관에 들러 종이가 누렇게 바랜 1963년 교지미추홀을 펼쳐 내 글을 보며 50년도 더 된 추억을 더듬는다.

 

추석연휴에 들렀던 인천시립박물관, 인천, 어느 날 영화가 되다전시는 잊었던 옛일을 고스란히 되살리게 해주었다. 당시에 썼던 거리 포스터, 입장권, 릴리스 필름 롤, 권총을 찬 서부의 사나이 게리 쿠퍼, 존 웨인이 그려진 커다란 간판을 머리에 인 애관, 미림, 동방, 키네마 문화 세계 등 극장 사진들이 손짓하며 잊었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모두 아련한 그리움 속의 추억이었다.

 

 

이 글은 나의 중, 고등학교 5년 선배의 글이기도 하지만 나의 추억 속에서도 공감하는 것들을 그려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있고,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명멸했던 극장 이름들을 생각하며 이 곳에 옮겨 본다.

 

인천극장, 인영극장, 인형극장, 오성극장, 미림극장, 문화극장, 애관극장, 키네마, 동방극장, 현대극장, 시민관, 도원극장, 세계극장, 자유극장, 장안극장, 중앙극장, 용현극장, 부평극장, 서부극장...(도대체 몇 개냐?)

 

위에서 보듯이 당시 인천의 번화가였던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극장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