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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297

후루다 (古田) 양품점 후루다 (古田) 양품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28 12:04:51 후루다 (吉田) 양품점 양품점은 모자 넥타이 와이셔츠,양산등을 취급했던 곳으로, 후루다 양품점은 1910년대에 이미 인천의 대표적인 상점 가운데 하나였다. 1920년대에 내동에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했던 대동상점이 들어서기 전까지 독점적 지위를 누렸으며,이 근처는 오카다 시계점에 ,전기축음기와 음반을 사려던 사람들로 붐비는 등 성업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는 현재 중앙동 4 가로 일본식 기와를 올린 합각지붕의 건물 이었는데, 당시 다른 상점과 달리 1,2층 사이에눈썹 지붕이 없고 2층 창문을 오르내리 창으로 처리 하는 등 외관에 서양식 건축 양식을적용했다. 2023. 5. 22.
연평도 파시(波市)의 추억 연평도 파시(波市)의 추억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9-03-25 23:01:37 연평도 파시(波市)의 추억 ▲ 유창호 (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어부들은 조기떼를 따르고, 물새들은 어부들을 따르고…. 파시(波市)란 글자 그대로 물결[波]을 타고 바다에서 열리는 시장[市]을 일컫는 말이다.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들은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북상해 2~3월에 흑산도, 3~4월에 안마도와 위도를 지나 5~6월에 연평도에 어장을 이루는데, 회유하는 수십억 마리의 조기를 따라 형성되는 시장이 곧 파시인 것이다. 중선배, 안강망배 할 것 없이 갑판 위까지 가득 조기를 싣고 섬으로 들어오면 마포, 개성, 인천, 군산 등 각지의 상고선(商賈船)·운반선들과 뒤섞여 곧바로 판매가 이.. 2023. 5. 22.
조선의 찬장 ‘연평도’ 조선의 찬장 ‘연평도’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18 14:33:38 조선의 찬장 ‘연평도’ ▲ 유창호 (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조기는 [ ] (이)다. 해마다 청명·한식이 되면 제주도 남방 동중국해에서 월동하던 조기들이 산란을 위해 서해바다로 대이동을 한다. 지금은 더 이상 서해연안에서 보기 힘들어졌으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기들은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칠산 앞바다로, 죽도로, 연평도로 그리고 평안북도 대화도까지 올라가 산란을 했다. 산란을 위해 회유(回遊)하는 조기들은 흡사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배 위의 어부들이 바다 속에 대나무 통을 넣고 조기 소리를 기다리며 그물을 쳤던 그 시절, 무게를 못 이겨 그물이 터질 정도로 .. 2023. 5. 22.
정부수립과 인천지역사회 정부수립과 인천지역사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18 14:32:49 정부수립과 인천지역사회 양윤모(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고 해도, 유엔이 정한 정식 절차에 따라 수립된 정부다. 무엇보다 총선거(5월 10일), 헌법 제정(7월 17일) 그리고 정부 수립(8월 15일)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구성된 역사상 최초의 정부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른바 라는 원칙을 충분히 구현한 것이다. 특히 5·10선거는 유엔 임시위원단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인천에서는 한국민주당으로 입후보한 곽상훈과 무소.. 2023. 5. 22.
광복과 인천지역사회 광복과 인천지역사회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3-05 19:57:21 광복과 인천지역사회 양윤모(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그 형태가 ‘도둑’처럼 왔던, 예정된 것이던 간에 그리고 해방(解放)이던, 광복(光復)이던 간에, 일제의 긴 식민통치가 끝난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모든 것이 1905년 혹은 그 이전 우리의 주권이 행사되던 그 상태로 복원된 것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지만,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주요 지역은 여전히 일본군 내지 일본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바로 혼돈의 시기였다. 라디오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들은 인천시민들은 그날 오후 애관극장 부근에 모여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다.. 2023. 5. 21.
백령진의 설치, 해랑적(海浪賊)을 잡아라 백령진의 설치, 해랑적(海浪賊)을 잡아라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9-02-28 00:53:07 백령진의 설치, 해랑적(海浪賊)을 잡아라 ▲ 유창호(옹진군지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는 흰 따오기가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이라 해 이름 지어졌다고 하나 이 섬의 역사는 그 이름만큼 낭만적이지는 못하다. 백령도는 고려 말 이래로 수없이 왜구(倭寇)와 해적(海賊)들의 침입을 받았고, 서해의 절도(絶島)라는 이유로 주요 범죄자들의 유배지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백령도는 일찍이 고려 태조 때 진(鎭)이 설치되고, 현종 9년(1018)에는 진장(鎭將)을 두었다. 그 규모 또한 정종 9년(1043)과 문종 5년(1051)에 발생한 대화재로 성문 200여 칸, 창고 50칸, 민로(民盧.. 2023.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