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500 만석동 똥마당 만석동 똥마당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0:38 인천시 동구 만석동 47 일원. 인천사람들은 예전에 이 곳을 「똥마당」이라 불렀다. 주민들에겐 별로 달갑지 않았던 동네이름. 지금은 고가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날 풍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똥마당」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진하게 묻어났던 삶의 터전으로 아직도 인천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이북에서 피난내려 온 사람들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이들은 어느덧 군락을 형성했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갔다. 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주거지. 그래서 이들은 도로공사에 사용하는 콜타르를 기름종이에 입힌 자재로 지붕을 올려 4~5평의 판.. 2023. 3. 8. 양키시장 양키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39:44 양키시장 인천시 동구 송림동 100번지 중앙시장. 인천인들에겐 「양키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해방직전인 1940년대 초 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물건을 사고 팔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앞에서 청과물을 팔던 채미전거리가 활성화하자 역 뒷편을 중심으로 노점상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이뤘다는 것이다. ▶ 양키시장 그러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인 尹昌浩씨가 축현역 뒷편 개천가에 야시장(지금의 포목점포 상가 일대)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야시장 개설후 맞은 편 공터에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 「인천부 .. 2023. 3. 8. 어시장 어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37:58 인천에 상설형태의 어시장이 들어선 시기 역시 `인천개항'과 맞물려 있다. 개항후 1880년대 말 무렵부터 인천거주 일본인들이 늘면서 수산물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생선을 위주로 한 일본 음식문화에 따라 생선소비량이 급증한 게 주요 요인. 일본은 그러나 생선공급량이 달리자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1887년 6월 어류가 풍부한 남양-강화 근해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포어(捕魚)제한규정'을 만들어 어로권과 함께 판매권을 따냈다. `근대식' 시설을 갖춘 어선을 앞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고기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 인천 연안부두 종합어시장-1. 당시 일본인들은 30여척의 동력어선을 투입해 인천 앞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그에 따라.. 2023. 3. 8. 문학산 사모지고개-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갑옷바위 문학산 사모지고개-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갑옷바위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2 12:19:02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갑옷바위 예전에 사모지 고개에서 동춘동쪽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바위 석함에 갑옷을 넣어 두었다 하여 갑옷바위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자 바위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바위는 사방 둘레에 금이 가 있는 데다가 아래위 바위 두 개가 뚜껑을 맞춰 덮은 모양으로 포개져 있는 것이 영락없는 상자 모양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상자 아래 부분은 일찍이 없어지고 뚜껑 형상의 바위는 얼마 전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화가 되면서 이 또한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 2023. 3. 8.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2 12:17:33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마을의 좌수가 급히 신발을 꿰면서 달려 나가자 부평 관아의 이방이 말했다. “한양에서 대제학 류사눌 나리의 조카이신 공조참의 나리께서 오셨소.” “아이구, 못 알아 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좌수는 허겁지겁 그 자리에 엎드렸다. 참의는 부평 부사보다도 두 직급이 높다. 건을 쓴 공조참의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당숙부이신 대제학께서 오늘 새벽 숙환으로 돌아가셨네. 그대가 아는지 몰라도 당숙.. 2023. 3. 8. 영종도전설-방귀와 오이씨 영종도전설-방귀와 오이씨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2 12:16:34 방귀와 오이씨 영종도에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들과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이 없어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연명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하루는 아이가 엉엉 울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이유를 물으니, 밖에서 놀 때면 아이들이 자꾸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린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이 끈질기게 물었다. “어머님, 왜 우리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겁니까? 동네 분들에게 듣자 하니 돌아가시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계시며, 또 무슨 연유로 헤어져 사는 건지요?” 아들의 물음에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 2023. 3. 8. 이전 1 ··· 570 571 572 573 574 575 576 ··· 58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