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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의 뜻 풀이 인천의 옛 지명, 미추홀의 숨은 뜻 풀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3 19:18:32 삼국사기에 명명된 미추홀은 인천의 옛 이름이면서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다. 사기가 쓰인 고려시대에는 한자의 음을 빌어다 쓰는 가차식 표기였기 때문에 한자를 해석해서 단어를 풀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미추홀을 해석하는 데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 가운데 유력한 설로 좁혀진 몇 가지만 소개한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얘기는 물의 고장이라는 해석이다. 미는 물의 원시 발음으로써 풀이하고 추를 사이로, 홀을 골로 보는 것이다. 문학산 일대가 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물의 고장, 다시 말해 물골이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거친 고장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고구려가 인천을 점령했을 때 매소홀로 부른 것에서 거슬러 유래를 풀.. 2023. 3. 9.
강화 석모도 보문사 석실 강화 석모도 보문사 석실 인천의관광/옛날옛날의 인천 2007-01-13 00:26:44 아름다운 보문사 석실 강화도 석모도에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세웠다고 하는 보문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은 정작 대웅전이 아니고 제2의 석굴암이라 알려진 보문사 석실(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커다란 자연 암벽에 동굴과 같은 이 석실에는 23개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어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첫째 이야기다. 어느 날 마을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어부들이 그물을 당겨 보니 보통 때와는 달리 묵직한 느낌이 느껴졌다. 큰 기대를 가지고 끌어올린 그물에는 그러나 고기는 한 마리도 없고 돌로 만든 자.. 2023. 3. 9.
덕적도 장사 박장군과 최장군 덕적도 장사 박장군과 최장군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3 00:22:33 장사 박장군과 최장군 옛날 덕적도 소야리에 매우 힘이 센 박 장군, 최 장군이란 두 사람이 있었다. 박 장군이 태어난 지 불과 한 해 정도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가 젖을 먹여 재워 놓고 외출 후 돌아와 보니 아이가 무거운 솥뚜껑을 열고 손으로 밥을 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 엄마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한편 걱정이 되었다. 이 아이가 장차 힘이 센 장사로 성장하면 화가 미치지 않을까. 결국 어머니는 눈을 질끈 감고 아이가 힘을 못 쓰게 어깨를 망치로 두들겨 때렸다. 그러나 아이는 끄덕도 없었다. 박 장군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스무 살 청년이 되었다. 이 무렵 소야리에서 지지라치배를 이용한 조기잡이가 한창이었다... 2023. 3. 9.
한국최초의 전화 한국최초의 전화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 것들 2007-01-12 12:52:04 한국최초의 전화 한국 통신역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자석식 전화기를 설치한 것은 1896년 10월 2일의 일이다. 궁중에 11백 회선의 전화교환기를 놓고 망건을 쓴 교환수들이 최초의 수동식 전화기인 덕진풍(텔레폰의 음을 한역함) 설치) 부처 간 전화를 연결했다. 그 후 1898년 1월 한성의 주요 관청에 전화를 가설했고, 다시 1900년 7월에 경성과 인천 간「시외전화」를 개통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백범 金九 선생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한국 최초의 「시외전화」인 경인 간 전화개통이 이보다 3년여 앞선 1897년 8월 23일이라고 밝힌다. 백범일지의 기록은 이렇다. 『사형은 형식적이나 임금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법.. 2023. 3. 9.
청관거리 청관거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9:28 청관거리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는 지금도 청관(淸館)거리로 불린다.「청관」이란 공식지명이 아니라 구한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국 조계(租界·19세기 후반 중국과 한국 등에 형성됐던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기도 했다)를 통칭하던 말. 그러나 조계가 폐지되고 나서도 이 명칭은 계속 사용됐다. 인천에 청관이 들어선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종 21년(1884년)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이 자기네보다 먼저 우리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계를 설정하자 서둘러 뒤따랐다. 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청국은 선린동(善隣)이란 이름도 이웃나라와 친선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지었다) 일대 5천여.. 2023. 3. 9.
수인선 협궤열차 수인선 협궤열차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8:10 수인선 협궤열차 사라지는 것들은 일쑤 우리를 그리움에 젖게 한다. 수인선 「꼬마열차」도 그런 아쉬움과 추억을 남기고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역의 「명물」중 하나. 국내 유일의 협궤열차였던 수인선은 일제의 물자수탈 수단으로 탄생했지만 반세기 넘게 인천_수원간 해안가 서민들의 발노릇을 톡톡히 하며 이들의 애환을 실어 날랐다. 열차 한량이 시내버스보다 작고 볼품도 없었지만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수인지역 주민들에겐 더 없이 소중했다. 그러다 산업화·도시화 물결에 밀려 운행 58년만인 지난 95년 12월 31일 「퇴역」했다. 일제는 1937년 경기도 이천·여주 지역 쌀과 소래·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수원역_남인천역(지금.. 2023.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