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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299

월미도에서 본 내항(1920년대) 월미도에서 본 내항(1920년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제 1선거 완공 후 인천항은 비로소 근대식 항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23. 4. 30.
1903년 제물포 건어물(북어) 하역장 1903년 제물포 건어물(북어) 하역장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제물포는 개항이후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물류유통의 거점지역으로서 각지로부터 농·수산물이 하역되었다. 북어를 지게꾼들이 하역을 하고 있는 중에 선상에서는 다른 화주가 북어짝 위에 앉아 하역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함경도가 주요 생산지인 북어가 제물포에서 하역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개항이후 동해안에 위치한 원산항에서 서해안에 위치한 제물포까지 대형 화물선의 운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제물포의 외항에서 부선작업을 마치고 접안한 배에서 지게로 연안작업을 하는 과정이다. 2023. 4. 30.
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 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트럭에 상차하는 광경으로 1950년 6·25 전쟁 후 국토가 망가지고 인구는 많아 UN으로부터 식량 원조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의 원조물자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이 되었다. 1960년대 영농기술의 발달로 우리나라는 식량(쌀)의 자급이 가능해졌지만 전쟁 후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길들어진 밀가루는 그 때부터 원조가 아닌 수입으로 그 공급 방식이 바뀌었다. 2023. 4. 30.
1905년 제물포항 1905년 제물포항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1905년 제물포항 1905년 제물포-월미도 간 가설된 나무다리가 준공되기 전 월미도에서 제물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으로 나룻배를 타고 월미도를 구경나온 일본인 여자아이와 조선인 사공이 보인다. 2023. 4. 29.
인천의 기독교(2) 인천의 기독교(2)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6 06:48:12 인천의 근대종교시설(2) - 인천의 기독교(2) -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조선은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기독교 포교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음 ▲ 아펜젤러가 도착했던 인천항과 신축된 대불호텔 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시키려는 노력은 상당 기간에 걸쳐 있어왔다. 그리해서 조선 주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성서의 번역과 그 보급을 통해 조선 선교를 실현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고, 이러한 성서 번역 사업은 선교사들이 조선어로 된 성경으로 전도 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에 보다 원활한 선교를 가능케 했다. 또한 조선어 성경은 보다 빠른 시일 내에 보다.. 2023. 4. 29.
인천의 기독교 인천의 기독교 인천의관광/인천의 옛모습 2008-05-26 06:47:13 인천의 근대종교시설(1) - 인천의 기독교 -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인천과 강화지역에는 천주교가 일찍부터 전래됐다. 한국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 선대의 세거지가 ▲ 이성진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 인천이며 그는 참수된 후 반주골(현재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 묻혔다. 또 그의 아들 택규와 신규도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역시 천주교도라는 명목으로 참형당했다. 황사영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도 강화읍 월곶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미 17세기 초엽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한역(漢譯)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서학의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사..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