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3500

소서노-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소서노-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18:45 고구려·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고 여걸 비류·온조 두아들 둔 과부…추모와 재혼하며 고구려 건국 전념 남편에 배신 당해 세 모자 망명…고난의 행군 끝에 백제 세워 초기 백제 가락동 유적에서 발굴된 원통형 그릇받침. 백제의 국모 소서노도 이런한 토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소서노(召西奴)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 우리 고대사 최고의 여걸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아직도 이처럼 대단한 여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인가. 역사교육이 잘못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숱한 전란으로 대부분의 역사기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2023. 3. 11.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14:44 월미도 연표로 알아본 인천의 역사 1454년 월미도 동명(洞名)은 북성동(北城洞). 조선 초기부터 이 곳에 ‘북성(北城)’이라는 성곽이 있었음. 단종2년(1454년) 정인지 등에 의해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는 “인천 서쪽 15~19리에 둘레 250 보(步)의 성이 있어 제물량. 제물포영, 제물진으로 불렀다.”고 기록. 1695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청에서 비변사에서 논의한 중요한 사항을 날마다 기록한 책) 숙종 21년(1695년) 3월 4일지에 ‘1656년 효종 7년에 월미도에 처음으로 관사를 짓고 행궁(行宮)으로 불렀음’을 밝힘. 1708년 4월 21일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월미도(月尾島)란 지명 등.. 2023. 3. 11.
인천과 소서노(召西奴) 인천과 소서노(召西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9 00:07:53 인천과 소서노(召西奴) 인천광장 - 김민기 인천언론인클럽회장 인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경주하면 신라의 고도, 불국사. 수원하면 화성과 정조대왕 능참배, 평양성, 개성하면 고려왕건. 전주하면 이성계, 전주이씨, 남원하면 성춘향 등 어느 한도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그 도시의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인천은 항구도시 외 별다른 게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요즘 인천국제공항과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생각날 뿐, 역사적으로 오랜 도시 치고는 그 도시의 과거가 뚜렷한 것이 없다. 지난달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가 '백제의 건국실화와 소서노'란 제목으로 문학산 공원화를 위한 제2차 학술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날 발표자로는.. 2023. 3. 11.
연평도 조기잡이 신 임경업 장군 연평도 조기잡이 신 임경업 장군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8 00:42:57 연평도 조기잡이 신 임경업 장군 조선 16대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 태종이 우리나라를 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의주 부윤 임경업 장군이 의주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술을 청나라 태종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는 의주를 피해 돌아서 다른 길로 서울을 공격했다. 적군이 의주를 피해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장군은 급히 군사들과 함께 도성으로 오려 하였으나 십만 대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격렬한 싸움이 계속 되었으나 결국 패배하여 인조 임금께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끊고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며 항복을 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 태종은.. 2023. 3. 11.
독갑다리-숭의동 독갑다리-숭의동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8 00:42:09 으스스한 이름의 도깨비다리 장사래말이라 불리던 숭의동은 오늘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이 변했지만, 1920년대 이전 낙섬 일대에 염전을 축조하며 긴 방죽을 쌓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1903년 장천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에 사행천(蛇行川)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개천이 있어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장사래말은 1906년에는 여의리, 장천리, 독각리로 나누어지는데 이 독각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독갑다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독갑다리에 대해서는 외다리를 뜻하는 ‘독각(獨脚)’에서 유래했다는 등 몇 가지의 해석과 견해가 있다. 아무튼 장사래말이나 독각리 같은 명칭이 사용된.. 2023. 3. 11.
강화-사모 바위와 족두리 바위 강화-사모 바위와 족두리 바위 인천의관광/인천의전설 2007-01-18 00:40:29 사모 바위와 족두리 바위 옛날 강화도의 혈구산 밑에 강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총명하여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다 외웠다. 그 집안에서는 이 아이가 자라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며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강 도령이 나이 열 다섯이 되던 어느 날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여보, 우리 아이도 이젠 장가 보낼 때가 되었는데 어디 좋은 규수가 없는지요?” “그렇지 않아도 한양의 김 대감 집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소. 내가 알기로도 그 쪽은 집안이나 규수도 나무랄 데가 없으니 조만간 내가 한번 한양에 다녀올 .. 2023.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