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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박물관 인천의 박물관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3:21 박물관은 「문화창조의 센터로서 지역 사회·문화 발전의 척도」로 일컬어진다. 영어 「Museum」의 유래를 봐도 박물관이 어떻게 시작됐는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기원전 3세기께 이집트 왕 프톨레마어 Ⅱ세가 부왕의 뜻을 이어 궁전 한 켠에 진귀한 수집품들을 모아 놓고 그리이스 학자들을 초청, 철학과 문예를 연구했으며 이곳을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해 철학, 미술, 문예 등을 담당하는 여신인 「Muse」에게 바쳤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것. 우리나라도 개화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영향으로 박물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기 시작됐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으면서 인천에서 박물관이 태동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지만,.. 2023. 3. 8.
요리집과 권번 요리집과 권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2:27 개항 이후 인천의 대중음식문화는 일본인과 청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뤄졌다. 한동안 이들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서울보다는 인천 개항장에서 더 많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청관거리의 중국음식점과 함께 이렇다 할 일본식 `요리집'이 인천에 가장 먼저 상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개항 초창기만 해도 인천의 음식점이라곤 주막과 목로술집, 국밥집, 색주가집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외국인들이 급격하게 늘면서 대형 전통 한식집과 일본 요리집, 중국음식점 등이 앞다퉈 들어서 음식문화를 이끌었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요리집은 기녀(妓女)를 접대부로 고용, 술과 음식을 내놓는 형태로 우리 술집문화와는 아주 달랐다. 당시 일본인들은 `어요리(御料理)'란 간.. 2023. 3. 8.
인천의 성냥공장 인천의 성냥공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1:35 인천의 성냥공장 군 복무를 한 대한민국 남자치고 아마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노랫말을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가사 내용이 저속해 대놓고 부르기는 좀 민망스러운 노래. 하지만 그래도 비속어가 통용(?)되는 군대라는 특수집단 내에선 6·25 이후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이었다. 군인들은 「우스개 말」이 담긴 이 노래를 부르며 피곤한 심신을 잠시 달래기도 했다. 실제로 성냥제조업은 반세기 이상 인천 공업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만큼 성냥공장이 많았다는 얘기. 성냥 제조업의 시발점이자 본거지가 바로 인천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세워진 곳이 어딘 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2023. 3. 8.
만석동 똥마당 만석동 똥마당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40:38 인천시 동구 만석동 47 일원. 인천사람들은 예전에 이 곳을 「똥마당」이라 불렀다. 주민들에겐 별로 달갑지 않았던 동네이름. 지금은 고가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날 풍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똥마당」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진하게 묻어났던 삶의 터전으로 아직도 인천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이북에서 피난내려 온 사람들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이들은 어느덧 군락을 형성했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갔다. 피난민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주거지. 그래서 이들은 도로공사에 사용하는 콜타르를 기름종이에 입힌 자재로 지붕을 올려 4~5평의 판.. 2023. 3. 8.
양키시장 양키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39:44 양키시장 인천시 동구 송림동 100번지 중앙시장. 인천인들에겐 「양키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해방직전인 1940년대 초 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물건을 사고 팔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앞에서 청과물을 팔던 채미전거리가 활성화하자 역 뒷편을 중심으로 노점상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이뤘다는 것이다. ▶ 양키시장 그러다 일본이 패망할 무렵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인 尹昌浩씨가 축현역 뒷편 개천가에 야시장(지금의 포목점포 상가 일대)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야시장 개설후 맞은 편 공터에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 「인천부 .. 2023. 3. 8.
어시장 어시장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2 12:37:58 인천에 상설형태의 어시장이 들어선 시기 역시 `인천개항'과 맞물려 있다. 개항후 1880년대 말 무렵부터 인천거주 일본인들이 늘면서 수산물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생선을 위주로 한 일본 음식문화에 따라 생선소비량이 급증한 게 주요 요인. 일본은 그러나 생선공급량이 달리자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1887년 6월 어류가 풍부한 남양-강화 근해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포어(捕魚)제한규정'을 만들어 어로권과 함께 판매권을 따냈다. `근대식' 시설을 갖춘 어선을 앞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고기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 인천 연안부두 종합어시장-1. 당시 일본인들은 30여척의 동력어선을 투입해 인천 앞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그에 따라.. 2023.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