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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358

[8]한국영화의역사- 1950년대 [8]한국영화의역사- 1950년대 영화계에도 6 · 25전쟁 후에는 많은 변모가 있었다. 전쟁을 피해 부산 대구 등지로 뿔뿔이 흩어진 영화인들은 공보부가 있는 부산에 많이 몰렸다. 그들은 시류(時流)에 맞춰 반공전쟁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령 한형모(韓瀅模) 감독의「정의의 진격」이라든가 임운학(林雲鶴) 감독의「진격만리(進擊萬里)」, 윤봉춘(尹逢春) 감독의「서부전선」「오랑캐의 발자취」,방의석(方義錫) 감독의 문화영화「육군포병학교」등이 그것이다 [註22] 그렇다고 목적영화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빈화(李嬪華)를 발탁하여 만든 윤봉춘 감독의「성불사(成佛寺)」라든가 이규동(李圭東) 감독의「귀향(歸鄕)」, 이흥만(李興萬) 감독의「청춘」등 극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휴머니즘을 밑에 깐 작품들로서 예술성.. 2023. 5. 26.
[7] 한국영화 의 역사 1940년대 [7] 한국영화 의 역사 1940년대 6 25전쟁 전까지의 영화는 어떠했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혼란과 분열은 영화가(映畵街)도 다를 바 없었다. 1945년 8월 19일에 조선영화건설본부(朝鮮映畵建設本部)가 조직되고 9월 24일에 미군정(美軍政) 보도부(報道部)로부터 뉴스영화 제작 의뢰를 받음으로써 광복영화(光復映畵) 활동이 시작되었다. 윤백남(尹白南)을 위원장으로 안석영(安夕影) · 이병일(李炳逸) · 김학성(金學成) 등 영화인들이 모인 영화건설본부는 지지부진했고 반면에 좌익분자들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추민(秋民)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영화동맹(朝鮮映畵同盟)인데 이는 1945년 12월 16일에 결성되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소탕 봉건주의 잔재의 청소 국수주의(.. 2023. 5. 26.
[6]한국영화의 수난 [6]한국영화의 수난 1940년부터 한국영화계는 질식기(窒息期)를 맞는다. 일제는 이미 1937년 8월 만주의 괴뢰정부(傀儡政府)로 하여금 만주에 있는 모든 민간영화사를 해산시키고 국책회사(國策會社) 만주영화협회를 창립시켜 같은 해 10월에는 영화법을 공포하여 제작 수출입 배합 상영 등을 강제로 일원화하는 한편 이를 한국에서도 재현하고자 꾀하였다. 그 첫 책략으로 조선총독부의 소관과(所管課)인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에서는 1939년 10월에 관제인 조선영화인협회를 강제로 발족시켰다. 회장에는 안종화(安鍾和)가 선임되었고 상무이사에 안석영(安夕影), 이사에 이규환(李圭煥) · 서월영(徐月影) · 이명우(李明雨) 등이, 그리고 평의원에 최인규(崔寅奎) · 이필우(李弼雨)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0년 2월.. 2023. 5. 26.
[5]발성영화기(發聲映畵期) 로의 이행(移行) 발성영화기(發聲映畵期) 로의 이행(移行) 메마른 영화풍토 속에서나마 한국영화계는 1935년에 이르러 몇가지 획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하나는 작품촬영에 현대식 조명장치가 도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성영화제작의 성공이었다. 이는 곧 한국영화의 발성영화시대로의 이행을 뜻한다. 조명시설의 경우 일찌기 일본 명고옥(名古屋)의 고전제작소에서 연기와 조명기술을 연구하고 귀국한 김성춘은 방한준(方漢駿) 감독의「살수차(撒水車)」에서 근대식 80KW 조명장치를 사용하므로써 조명분야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며 조명기술상에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후자의 발성영화장치는 영화촬영의 제1인자인 이필우에 의해서 성공되므로서 우리 영화를 일약 2차원의 세계로 이끌어 올린 것이다. 이필우는 1926년경부터 미국에서 성공한 토.. 2023. 5. 26.
[3]모작기(模作期)의 개막(開幕) 李月華 土月會의 名女優로 아득한 옛날에는 尹白南氏의 「月下의 盟誓」를 비롯하야 「海의 悲曲」이래 극단까지 조직하얏든 여걸(?), 지금은 上海 어느 카페에서 땐써로 뚱뚱한 몸이 아조 절구통 같이 팽대해 젓다는 소식을 전한다. # 출처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잡지명동광 제23호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필자 沈熏 모작기(模作期)의 개막(開幕) 한때 활기를 띠던 키노 · 드라마시대가 종막을 내리고 있을 무렵에 윤백남(尹白南)이 감독한「월하(月下)의 맹서(盟誓)」라는 극영화가 제작되었다. 비록 조선총독부의 시책영화(施策映畵)로서 저축장려를 주제로 한 소품이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우리 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극영화인 만큼 그 의의는 적지 않았다. 이 작품의 남자배우로는 권일청(權日晴) · 문수일(文秀一) ·.. 2023. 5. 26.
[2]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과 한국영화의 창작 [2]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과 한국영화의 창작 신극운동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일익을 담당하고 국어계도(國語啓導)에 앞장서기 위하여 시작되었으나 점차 변질되어 대중적인 기호와 취향에 영접하려는 신파로 전락되었다. 그런데 16년이란 오랜 사극시대(史劇時代)를 거치는 동안 한국영화는 신파무대극의 흥행목적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기형적인 연쇄활동사진(連**活動寫眞)이라는 형태로 발생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극장은 궁내부(宮內府) 소속의 협율사(協律社)였다. 협율사는 1902년 고종황제어극 40주년 칭경예식에 참석한 많은 외국사신들을 초빙하여 전통적인 가무와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었으나, 이러한 행사가 생략되자 국립극장격인 협율사는 기녀들의 가무를 비롯하여 줄타기와 마술까지 공연되었고 한때는 .. 2023. 5. 26.